*티리온 1은 마틴이 공개했지만 사본이 존재하지 않음.

 

저 멀리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남자가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말에 올라라!" 둘째 아들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북쪽에 위치한 숙영지에서, 한 남자가 기스카어로 고함을 질렀다. "말에 올라라! 말에 올라!" 높고 새된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가르고 숙영지 너머 멀리까지 퍼졌다. 티리온의 기스카어 실력은 딱 그 정도 말을 알아들을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 서린 두려움은 어떤 언어로든 분명했다. 어떤 심정일지 알아. 

 

말을 찾을 때가 되었다. 죽은 소년의 갑옷을 입고 장검과 단검을 매고 패인 자국 있는 대투구를 쓸 때가 되었다. 새벽이 지나자 도시의 성벽과 탑 너머로 태양이 떠올라 눈이 멀 만큼 밝은 햇살이 비쳤다. 서쪽으로는 별들이 하나씩 흐려졌다. 스카하자단을 따라 트럼펫이 불렸고 미린의 성벽에서는 전투 나팔로 화답했다. 강어귀에서는 불타는 배가 가라앉았다. 하늘에서는 죽은 자와 드래곤들이 나는 동안, 노예상만에서는 군함이 맞부딪혀 충돌했다. 티리온이 있는 자리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소리는 들렸다. 선체와 선체가 부딪히면서 박살 나는 소리, 강철인의 굵은 전투 나팔과 콰스의 이상하게 높은 호각 소리, 노가 쪼개지는 소리, 외침과 전투 함성, 갑옷에 도끼가, 방패에 검이 내리쳐지는 소리- 모두 다친 남자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섞여들었다. 대부분의 배는 아직 만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기에 거기서 나는 소리는 멀리서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지만, 그래도 티리온은 알았다. 살육의 음악이다.

 

그가 선 자리로부터 270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악한 자매가 솟았다. 시체를 움켜쥔 그녀의 기다란 팔이 위로 덜커덩 움직이더니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벌거벗고 부푼 창백한 죽은 새들이 사지가 축 늘어진 채 공중을 가르며 떨어졌다. 공성 진영은 천박한 장밋빛과 금빛에 뒤덮여 일렁였지만 미린의 그 유명한 계단식 피라미드는 밝은 빛과 대조되는 암흑으로 우뚝했다. 한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티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드래곤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독수리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주  거대한 독수리겠지만.

 

둘째 아들들의 퀴퀴한 천막에서 며칠이나 숨어 지냈더니 바깥 공기가 신선하고 맑게 느껴졌다. 티리온이 있는 자리에서 만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싸한 소금 냄새가 바다가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티리온은 그 공기로 폐를 채웠다. 전투하기 좋은 날이군. 동쪽에서 북 치는 소리가 메마른 평원을 가로질러 들려왔다. 기마병 한 무리가 바람결단의 푸른 깃발을 휘날리며 마귀할멈 곁을 쏜살같이 달렸다.

 

더 어린 남자였더라면 모든 걸 즐겁게 느꼈을지도 몰랐다. 더 멍청한 남자였더라면 젖꼭지에 고리를 단 더럽게 못생긴 융카이 노예 병사가 자기 눈 사이에 도끼를 꽂아 넣기 전까지는 이 모든 걸 장엄하고 영광스럽다 여겼을지도 몰랐다. 티리온 라니스터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신들은 나를 검을 휘두를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으면서 왜 자꾸 날 전투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단 말이야?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첫 번째 전투로 생각이 미쳤다. 타이윈 공의 나팔 소리에 깬 샤에가 처음으로 동요한 사람이었다. 밤사이 그를 즐겁게 해줬던 달콤한 나팔이 겁먹은 아이가 되어 벌거벗은 채 품 안에서 떨었더랬다. 아니면 그것도 전부 내가 날 용감하고 멋지다고 느끼도록 하려고 꾸며낸 술수였을까? 참 대단한 배우가 됐을 텐데. 갑옷 입는 걸 도우라고 포드릭 페인을 소리쳐 불렀었지만, 그 소년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최고로 잽싼 녀석은 아니었지만, 결국엔 괜찮은 종자였지. 나보다 나은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좋겠군.

 

이상하게도 블랙워터보다 그린포크가 훨씬 생생하게 기억났다. 내 첫경험이었으니까. 첫 번째는 절대 잊지 못해. 티리온은 갈대 사이로 창백한 손가락처럼 강 위를 흘러가던 안개를 기억했다. 자줏빛 하늘 위로 흩뿌려진 별들과 아침 이슬로 반짝이는 들판, 동쪽에서 화려한 붉은빛으로 떠오르던 아름다운 해돋이도 뚜렷이 기억했다. 포드와 함께 티리온이 짝짝이 갑옷을 입는 것을 돕던 샤에의 손길도 기억했다. 그 염병할 투구. 못이 박힌 양동이 같았지. 그래도 그 못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첫 번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도왔지만, 그로트와 페니마저도 그날의 그보다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았으리라. 샤에는 강철을 두른 티리온더러 '무시무시하다'고 했더랬다. 어쩜 그렇게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멍청할 수가 있었을까? 자지로 생각하는 것보단 정신머리가 있었어야지.

 

둘째 아들들은 안장을 얹는 중이었다. 서두르는 일 없이 침착하고 정확한 손길이었다. 그들이 전에 백 번은 해봤을 별것 아닌 일이었다.  몇몇은 손에 손으로 와인 아니면 물이 들었을 가죽 물통을 돌렸다. 보코코는 거리낌 없이 자기 연인과 입을 맞추며 거대한 한쪽 손으로는 그 소년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다른 쪽 손은 머리카락 속에 파묻었다. 그 뒤에선 가리발드 경이 자신의 덩치 큰 거세마의 갈기를 빗질해주고 있었다. 켐은 바위에 앉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죽은 형제를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킹스랜딩에 서 살았을 때 알았다던 친구라던가. 망치와 쇠못은 사람들 사이를 옮겨다니며 갑옷을 조정하고 창과 장검을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날을 갈았다. 날치기는 초엽을 씹으면서 갈고리 손으로 불알을 긁으며 농담을 던졌다. 어째서인지 날치기를 보면 브론이 생각났다. 이젠 블랙워터의 브론 경이겠지. 세르세이가 죽이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을걸. 문득 둘째 아들들이 지금껏 겪은 전투는 몇이나 될지가 궁금해졌다. 소규모 교전은 몇 번이고, 습격은 몇 번이나 해 봤을까? 휩쓸고 지나간 도시는 몇이며, 썩게 내버려 두거나 묻어야 했을 형제는 또 몇이었을까? 이들과 비교하자면 티리온은 아직 풋내기 소년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티리온이 용병단원 절반보다 더 나이 들긴 했지만.

 

이번이 그의 세 번째 전투가 되리라. 피로 물들어 노련한, 인장이 찍혀 봉해진 증명된 전사, 그게 나야.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입히고, 나 자신도 다하고서 내가 칼을 휘두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려고 살아남았지. 선봉에도 섰고, 병사들이 내 이름을 외치는 것도 듣고, 나보다 더 크고 더 나은 남자들을 쓰러뜨렸어. 영광이란 것도 조금 맛보았지... 그게 영웅들을 위한 풍성한 와인 아니던가? 또 한 모금을 마다할 이유가 뭔데? 하지만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피를 차갑게 식혔다. 그는 내내 자신에게 살든 죽든 상관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가마, 장대배, 돼지, 노예선과 무역 갤리선, 창녀와 말을 타고 세상의 절반을 건넜지만... 결국 자신이 꽤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었다.

 

이방인이 창백한 암말을 타고 손에 칼을 쥔 채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지만, 티리온 라니스터는 그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꼬마 악마, 넌 정말 사기꾼이야. 위병 백 명이 네 아내를 강간하게 두고, 입씨름하다 아버지의 배를 쏴버리고, 연인의 목에 황금 사슬을 감아서 얼굴이 시커메질 때까지 비틀었지만 그래도 넌 네가 계속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티리온이 막사로 돌아갔을 때 페니는 이미 갑옷을 입은 상태였다. 페니는 연극 일을 하느라 몇 년 동안이나 자기 몸에 나무 갑옷을 둘렀었다. 걸쇠와 버클을 죄는 법만 안다면 진짜 판금과 쇠사슬 갑옷도 별다를 게 없는 법이었다. 만일 이곳저곳 찌그러지고 녹슬고 긁히고 얼룩지고 색이 벗겨졌다 한들 상관없었다, 검을 막는 데엔 여전히 유용할 테니까.

 

유일하게 페니가 걸치지 않은 무장은 투구였다. 티리온이 들어서자 그녀가 시선을 들었다. "갑옷을 안 입었네요. 무슨 일이에요?"

 

"평소 같은 일들이지. 진흙과 피, 영웅적인 행위들, 죽임과 죽음. 저기 만이랑 도시 성벽 아래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융카이군이 어디로 돌아서던 뒤에 적을 두게 되는 거야. 가까운 쪽 상황은 아직 괜찮지만, 곧 우리도 투입될 걸." 어느 쪽이든지 간에. 티리온은 둘째 아들들이 또 주인을 갈아치울 때가 되었다고 거의 확신했다... 확실한 것과 거의 확실한 것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했다면, 우린 모두 진 거야. "투구 쓰고 다 튼튼하게 조여졌는지 확인해봐. 한번은 빠져 죽지 않으려고 투구를 벗었는데, 그 대가를 코로 치렀지." 티리온은 자기 흉터를 가리켰다.

 

"먼저 당신이 갑옷을 입어야죠."

 

"원한다면. 조끼를 먼저 입고. 삶은 가죽에 철 단추를 단 거로. 그 위엔 고리 갑옷을 걸치고 목 가리개를 해야지." 그는 막사 안을 둘러보았다. "와인이 있나?"

 

"아뇨."

 

"어제 저녁 먹은 뒤 반 병이 남았었잖아."

 

"반의 반 병이고, 그것도 마셔버렸잖아요."

 

티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와인 한 잔에 누나를 팔겠다."

 

"당신은 말 오줌 한 잔이어도 누이를 팔 거잖아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지라 티리온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 오줌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잘 알려져 있었던가, 아니면 내 누이를 만나본 적이 있는 건가?"

 

"소년 왕을 위해 시합을 했을 때 딱 한 번 봤을 뿐이에요. 오빠는 왕비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죠."

 

그로트는 멍청한 이름의 발육부진 아첨꾼이야. "전투에 맨정신으로 나가는 사람은 바보밖에 없지. 플럼은 와인을 마실걸. 플럼이 싸우다 죽으면 어떡하지? 와인을 낭비하는 건 죄악인데."

 

"말하지 말아요. 조끼 끈을 매야 하니까."

 

티리온은 노력했지만, 살육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고 혀는 가만히 있으려 하질 않았다. "푸딩 얼굴은 용병을 써서 강철인을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고 싶을 거야." 티리온은 옷을 입혀주고 있는 페니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인간은 내시들이 성문에서 3미터 넘게 나오기 전에 자기 기병 전부를 내시들한테 돌격시켰어야 했어. 고양이는 왼쪽으로, 우리랑 바람결단은 오른쪽으로 보내서 측면 양 끝을 찢어버렸어야지. 일 대 일이면 거세병도 다른 창병과 다를 바 없어. 거세병의 규율이 무서운 거지, 대열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면..."

 

"팔 들어요." 페니가 말했다. "그래요, 더 편하죠. 어쩌면 당신이 융카이군을 지휘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병사도 노예인데, 노예 지휘관도 안 될 거 있겠어? 그래도 그러면 시합을 망치는 거지. 이건 현명한 주인들의 시바스 게임에 불과해. 우리는 장기말이고." 티리온은 생각에 잠겨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 노예상들, 내 아버지랑 그 면에서 공통점이 있군."

 

"당신 아버지요? 무슨 뜻이죠?"

 

"그냥 내 첫 번째 전투를 생각 중이었어. 그린포크. 강하고 길을 사이에 두고 싸웠었지. 아버지의 전열 배치를 보고서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했던 게 기억나. 태양을 향해 꽃잎을 펼친 꽃, 강철 가시를 두른 진홍색 장미 같았지. 그리고 아버지는, 아, 그만큼 눈부시게 빛난 적이 없었어. 진홍빛 갑옷에 금실로 만든 무거운 망토를 둘렀었지. 어깨엔 황금 사자 한 쌍이 앉았고, 투구에도 한 마리가 있었지. 아버지의 종마는 정말 훌륭했어. 타이윈 공은 그 말 위에 앉아서 모든 전투를 지켜보았고, 90미터 안으로 어떤 적도 들어오지 못했어. 타이윈 공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고, 미소짓지도 않았고, 땀을 흘리지도 않았어, 수천 명이 자기 발밑에서 죽어가는데 말이야. 내가 의자에 앉아서 시바스 게임판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해봐. 우린 거의 쌍둥이처럼 보일 거야... 나한테 말이랑 진홍빛 갑옷, 금란 망토가 있어야 말이지만. 또 타이윈 공이 나보다 키가 크긴 하지. 머리카락은 내가 더 많고 말이야."

 

페니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페니는 새처럼 재빠르게 달려들어 자기 입술을 티리온에게 눌렀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이건 뭐지? 거의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티리온은 이미 알았다. 고마워, 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다시 입 맞춰도 좋단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얘야, 널 해치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페니는 아이가 아니었고 그가 그렇게 바란다 한들 정말 그리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상 처음으로 티리온 라니스터는 말문을 잃었다.

 

너무나 어리게 생겼어. 티리온은 생각했다. 페니는 소녀에 불과해. 난쟁이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거의 예쁘장해 보일 소녀. 숱 많고 곱슬곱슬한 페니의 머리카락은 따뜻한 갈색이었고, 두 눈은 크고 순진했다. 너무 순진해.

 

"저 소리 들려?" 티리온이 말했다.

 

페니가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죠?" 티리온의 자라지 못한 다리에 짝짝이 정강이받이를 채우며 그녀가 물었다.

 

"전쟁. 여기서 5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 양쪽에서 벌어지고 있지. 전쟁은 살육이야, 페니. 남자들이 내장을 늘어뜨린 채 진흙탕을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고, 잘린 팔다리에 부러진 뼈와 피로 된 웅덩이가 전쟁이야. 비가 많이 온 뒤면 벌레들이 땅에서 나오는 거 알지? 땅이 피로 푹 젖을 만큼 큰 전투 뒤면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군. 전쟁이란 이방인이 온다는 뜻이야, 페니. 검은 염소, 창백한 아이, 다면의 그분, 원하는 대로 불러. 그건 죽음이야."

 

"무서워요."

 

"그런가? 잘됐군. 무서워해야지. 해안에는 강철인이 들끓고 바리스탄 경과 거세병이 도시 성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중인데, 그사이에 낀 우리는 잘못된 편에서 싸우고 있어. 나도 죽도록 무서워."

 

"그렇게 말하지만 계속 농담하고 있잖아요."

 

"농담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한 가지 방법이지. 와인은 또 다른 방법이고."

 

"용감하네요. 작은 사람도 용감할 수 있죠."

 

나의 라니스터 거인, 티리온은 들었다. 날 조롱하고 있어. 또 페니의 뺨을 때릴 뻔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화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페니가 말했다. "용서해 줘요. 그냥 겁먹은 것 뿐이에요." 그녀가 티리온의 손을 만졌다.

 

티리온은 페니의 손길을 뿌리쳤다. "무서워요." 샤에가 하던 말과 똑같았다.샤에의 눈은 달걀만큼 컸고, 난 그걸 모조리 삼켰지. 난 샤에가 뭔지 알았어. 브론한테 여자를 하나 데려오라 했더니 샤에를 가져다줬지. 티리온의 손이 주먹으로 말리고, 활짝 웃는 샤에의 얼굴이 눈앞에서 떠다녔다. 그러더니 쇠사슬이 샤에의 목에 감겼다. 샤에의 손이 티리온의 얼굴 앞에서 나비만한 힘으로 버둥대는 동안 황금으로 된 손은 샤에의 살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만약 티리온에게 쇠사슬이 있었더라면... 석궁이나 단검, 뭐라도 있었다면 그는... 어쩌면... 그가...

 

그제야 티리온은 고함 소리를 들었다. 기억의 바다에 잠겨 시커먼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지만, 고함 소리가 순식간에 세상을 다시 불러왔다. 티리온은 손을 펴고, 숨을 들이쉬고 페니에게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생겼어." 그는 그게 뭔지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드래곤이다.

 

녹색 짐승은 부서지고 불타는 장선과 갤리선을 아래에 두고서 만 위를 비스듬히 날며 빙빙 돌고 있었지만, 용병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쪽은 흰색이었다. 270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악한 자매가 팔을 휘두르자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신선한 시체 여섯 구가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위로, 위로, 또 위로. 그러더니 두 구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타는 시체가 막 떨어지려는 순간, 드래곤이 이빨 사이로 창백한 불꽃을 흘리면서 턱으로 시체를 으드득 씹었다. 흰 날개 한 쌍이 아침 공기를 가르자 짐승이 다시 공중으로 솟았다. 두 번째 시체는 너무 멀리 뻗은 발톱에 맞고 튕기더니 곧장 떨어져서 융카이 기병들 가운데로 추락했다. 그들 중 몇몇도 불에 붙었다. 말 한 마리는 앞발을 들고 일어나 기수를 던져버렸고, 나머지는 불길에서 벗어나 몸을 식히려고 도망쳤다. 티리온 라니스터는 야영지에 번지는 공포를 거의 맛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톡 쏘는 익숙한 소변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난쟁이는 주위를 둘러보고서 오줌을 지린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잉크통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가서 바지 갈아입어야겠는데." 티리온이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러는 김에 편도 갈아타라고." 경리감은 얼굴이 핼쑥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전령이 말을 달려왔을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드래곤이 하늘에서 시체들을 낚아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망할 장교로군. 티리온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금 말을 타고 황금 갑옷을 입은 그 전령은 큰 소리로 자신이 융카이 최고사령관인 고귀한 세력가 고르자크 조 에라즈의 명으로 왔음을 알렸다. "고르자크 님께서 플럼 대장에게 찬사와 더불어 병사들을 만 해안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청하셨다. 우리 함대가 공격받고 있다."

 

너희 함대는 침몰하고 불타고 도망치는 중이겠지. 티리온은 생각했다. 배는 탈취당하고 선원들은 칼에 찔리고 있겠고. 그는 캐스털리 락의 라니스터였고, 멀지 않은 곳에 강철 군도가 위치했다. 강철인 약탈자들은 라니스터의 해안에서 낯설지 않았다. 강철인들은 수 세기에 걸쳐 라니스포트를 적어도 세 번 불태웠고 스물다섯 번 가까이 습격했다. 서부인이라면 다들 강철인이 얼마나 잔학한지 알았다. 이 노예주들은 이제 막 배우는 단계일 뿐이었다.

 

"대장은 지금 여기 안 계시오." 잉크통이 전령에게 말했다. "여장군을 보러 가셨소."

 

기수가 태양을 가리켰다. "말라자 아가씨의 명령은 해가 뜨면서 끝났다. 고르자크 님 명대로 해라."

 

"오징어 함대를 공격하라는 건가? 저기 물 위에 떠 있는 걸?" 경리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로선 어째야 할지 모르겠지만, 갈색 벤이 돌아오면 너희 고르자크가 뭘 원하는지 알리겠소."

 

"내 말은 명령이다. 지금 당장 수행해."

 

"우리는 우리 대장 명령만 따르오." 잉크통이 평소의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 안 계신다고 말했지 않소."

 

전령이 인내심을 잃는 게 보였다. "전투가 이미 시작됐는데. 너희 지휘관도 함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닌 걸 어쩌나. 그 여자애가 불러서 가셨다니까."

 

전령의 얼굴이 보랏빛이 되었다. "당장 명령대로 하지 못할까!"

 

날치기가 잘 짓이겨진 초엽 한 덩어리를 입 왼쪽으로 뱉어내더니 융카이 기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는 전부 나리님처럼 기병입니다. 잘 훈련된 군마라면 창으로 된 벽은 뛰어넘겠죠. 불구덩이를 뛰어넘을 놈들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물 위를 달릴 수 있는 말이 있다곤 못 들어봤습니다."

 

"배에서 병사를 내리고 있단 말이다!" 융카이 귀족이 악을 썼다. "스카하자단 입구를 화공선으로 틀어막았는데, 네놈이 여기서 나불거리는 동안 병사 백 명이 또 첨벙거리며 상륙 중이다. 병사들을 모아서 다시 바다로 밀어 넣어! 당장! 고르자크의 명령이다!"

 

"어느 쪽이 고르자크죠?" 켐이 물었다. "토끼인가?"

 

"푸딩 얼굴." 잉크통이 말했다. "토끼는 장선을 상대로 경기병을 보낼 멍청이가 아냐."

 

그쯤하면 기수도 충분히 들었다. "고르자크 조 에라즈 님께 네놈이 명령을 거부했다고 알리겠다." 그가 뻣뻣하게 말하더니 용병들의 왁자지껄한 폭소 가운데 금마를 돌려 왔던 길로 질주해 나갔다.

 

잉크통이 웃음기를 거둔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만." 그가 갑자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리로 돌아가. 안장을 얹어라. 대장이 제대로 된 명령을 들고 돌아왔을 때 다들 즉시 달려 나갈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리고 요리불은 꺼. 전투가 끝나도 살아있을 만큼 명줄이 질기다면 그때 먹어도 늦지 않겠지." 그의 시선이 티리온에게로 떨어졌다. "뭘 히죽거리고 있나? 그 갑옷을 입으니 꼬마 광대 같군, 반쪽이."

 

"광대가 되기보단 광대처럼 보이는 게 낫지." 난쟁이가 답했다. "우린 지는 편에 섰어."

 

"반쪽이 말이 맞다." 조라 모르몬트가 말했다. "대너리스가 돌아왔을 때 노예주들을 위해 싸우고 있고 싶지 않아... 그리고 대너리스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다. 지금 제대로 공격하면 여왕은 잊지 않을 걸세. 인질을 찾아서 풀어줘. 그렇게 하면 내 가문과 고향의 명예를 걸고 이게 처음부터 갈색 벤의 계획이었다고 맹세하지."

 

노예상만에선 또 다른 콰스 갤리선이 갑자기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동쪽에서는 코끼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섯 자매의 팔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시체를 던졌다. 미린의 성벽 아래에는 창으로 된 두 개의 벽이 함께 섰고, 방패는 방패에 부딪혔다. 머리 위로 빙빙 나는 드래곤들의 그림자가 친구든 적이든 가리지 않고 올려다보는 얼굴 모두를 쓸고 지나갔다.

 

잉크통이 손을 들어 올렸다. "난 장부를 보관한다. 금을 관리하고. 계약서를 쓰고 임금을 저축하고 식량을 살 만큼 충분한 돈이 있게 하는 게 내 일이다. 어느 편에서 싸울지, 언제 싸울지를 내가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건 갈색 벤의 몫이니까. 벤이 돌아오면 그분에게 맡기도록 하지."

 

플럼이 동료들과 함께 여장군의 막사에서 질주해서 돌아왔을 무렵 흰색 드래곤은 미린 꼭대기의 자기 은신처로 되돌아가고 없었다. 녹색 쪽은 여전히 커다란 초록색 날개를 펼치고 도시와 만 위를 큰 원으로 돌며 어슬렁거렸다.

 

갈섹 벤 플럼은 끓인 가죽 위에 쇠사슬과 판금 갑옷을 걸쳤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비단 망토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며 연한 청자색에서 짙은 자주색으로 바뀌었는데, 그것만이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플럼은 훌쩍 내리더니 마부에게 말을 맡기고서 날치기에게 장교들을 부르라 일렀다.

 

"빨리 오라고 해." 교활한 카스포리오가 덧붙였다.

 

티리온은 하사관조차도 아니었지만, 시바스 게임 덕에 그가 갈색 벤의 막사에 있는 모습에 다들 익숙했고 티리온이 나머지와 함께 천막에 들어섰을 때 막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소환받은 사람으로는 카스포리오와 잉크통 말고도 울란과 보코코가 있었다. 난쟁이는 조라 모르몬트 경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사악한 자매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갈색 벤이 알리자 나머지가 불편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조라 경이 입을 열었다. "누구의 명이지?"

 

"그 여자애 명령이다. 할아버지 경이 노리는 건 마귀할멈이지만, 다음으로 사악한 자매를 노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유령은 이미 쓰러졌고. 마르셀렌의 해방 노예들이 긴 기마창단을 썩은 나뭇가지 다루듯 부숴버리고 쇠사슬로 유령을 끌고 가버렸다. 셀미가 트레뷰셋을 전부 쓰러뜨리려 할 거라고 생각하더군."

 

"그 입장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조라 경이 말했다. "나라면 더 일찍 했겠지만."

 

"왜 계속 명령을 내리는 거지?" 잉크통의 목소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새벽은 이미 지났는데. 태양을 못 본답니까? 자기가 최고사령관인 것처럼 굴고 있잖습니까."

 

"만약 자네가 그 여자인데 푸딩 얼굴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 알고 있다면 자네라도 계속 지휘권을 쥐고 있을걸." 모르몬트가 말했다.

 

"둘 다 거기서 거기야." 카스포리오가 주장했다.

 

"그렇지. 그래도 말라자한텐 젖이 달렸다고." 티리온이 말했다.

 

"사악한 자매를 지키려면 석궁을 써야지. 전갈석궁. 망고넬. 고정된 물체를 지키려고 기병을 쓴다고? 우리더러 보병이 되란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자기네 투석기병이나 창병을 쓰지 않고?" 잉크통이 말했다.

 

천막 안으로 켐의 밝은 금발머리가 불쑥 들어왔다. "나리님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전령이 또 왔습니다. 최고사령관의 새 명령을 받들고 왔다 합니다."

 

갈색 벤이 티리온을 힐끗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들여보내."

 

"여기로 말입니까?" 켐이 당황해서 물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여기지 않나." 플럼이 살짝 짜증 난 투로 말했다. "다른 곳에 가면 날 못 보겠지."

 

켐이 나갔다. 돌아왔을 때 켐은 노랑 비단 망토와 거기에 어울리는 판탈롱을 걸친 융카이 귀족을 위해 천막을 걷어주었다. 그 남자의 기름 바른 검은색 머리카락은 엄청난 강도로 꼬인 채 고정되서 마치 머리에 조그마한 장미 백 송이가 피어 있는 것 같았다. 흉갑에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타락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어서 티리온은 동질감을 느꼈다.

 

"거세병이 하피의 딸을 향해 진격 중이다." 전령이 알렸다. "핏빛 수염과 기스카 군단 둘이 맞서 싸우고 있지. 그들이 방어선을 사수하는 동안 자네들이 내시들 뒤를 덮쳐 피해 없이 쓸어버린다. 최고로 고귀한 권세가이신 융카이 최고사령관 모르가즈 조 제즈진 님의 명이다."

 

"모르가즈?" 카스포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의 지휘관은 고르자크인데."

 

"고르자크 조 에라즈는 펜토스 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자신을 누더기 왕자라 칭하는 그 변절자는 이 악행에 대한 죗값으로 비명을 지르며 죽게 되리라고 고귀한 모르가즈 님께서 맹세하셨다."

 

갈색 벤이 턱수염을 긁었다. "바람결단이 넘어갔군, 그렇지?" 흥미가 담긴 어조였다.

 

티리온은 낄낄 웃었다. "푸딩 얼굴을 주정뱅이 정복자와 맞바꿨군그래. 술독에서 기어나와서 그럭저럭 분별 있는 명령을 내렸다는 게 놀라운데."

 

융카이인이 난쟁이를 노려보았다. "그 입 다물어라, 이 해충 같은-" 그의 모욕이 멈췄다. "이 건방진 난쟁이는 탈출 노예로군." 그가 충격에 휩싸여 선언했다. "이자는 고귀한 예잔 조 카가즈의 소유다."

 

"잘못 본 걸세. 이쪽은 내 전우, 자유인이자 둘째 아들들이지. 예잔의 노예들은 황금 목걸이를 차지 않나." 갈색 벤이 자신의 가장 정감 가는 미소를 내보였다. "작은 종을 매단 황금 목걸이. 종소리가 들리나? 난 아닌데."

 

"목걸이는 제거할 수 있는 법. 이 난쟁이를 처벌하게 당장 내어줘야겠다."

 

"그건 너무한데. 조라, 어떻게 생각하나?"

 

"이렇게." 모르몬트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기수가 몸을 돌리자 조라 경이 그자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검 끝부분은 융카이인의 목 뒤쪽에서 축축한 붉은색이 되어 튀어나왔다. 전령의 입술과 턱을 따라 피가 거품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 남자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두 걸음을 내딛더니 시바스 판 위로 쓰러졌다. 나무로 조각한 군대가 사방에 흩어졌다. 융카이인은 한쪽 손으로 모르몬트의 검을 붙잡고서 다른 쪽 손으로는 뒤집힌 탁자를 힘없이 긁으며 몇 번 더 움찔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홍수처럼 쏟아진 붉은 피와 기름진 검은 장미 가운데 얼굴을 카펫에 처박은 남자가 누웠다. 조라 경이 시체에서 장검을 비틀어 빼내자 칼날이 빠져나온 자리로 피가 흘렀다.

 

흰색 드래곤은 티리온의 발치에 멈췄다. 티리온은 카펫에 떨어진 시바스 말을 주워들고 소매로 닦았지만 피가 조각 홈에 스며들어 흰 나무에 붉은 혈관이 생기게 되었다. "모두 친애하는 대너리스 여왕님께 만세." 살았던 죽었던 간에. 티리온은 피 묻은 드래곤을 공중에 던지고 낚아채고서 씩 웃었다.

 

"우린 언제나 여왕님을 섬겼다." 갈색 벤 플럼이 선언했다. "융카이와 다시 손을 잡았던 건 계략이었을 뿐이야."

 

"참으로 영리한 계책이었지." 티리온은 장화 신은 발로 죽은 남자를 툭 밀었다. "저 흉갑이 맞으면 내가 가지겠어."

래스(Wrath)곶의 남쪽 해안을 따라 허물어진 석조 감시탑이 줄줄이 늘어섰다. 도르네인이 바다를 통해 기습해올 경우에 대비해 세운 고대의 건축물이었다. 마을이 그 탑들 근처에서 생겨났고, 몇몇은 소도시로까지 꽃을 피웠다.

 

'송골매'호는 젊은 드래곤(*다에론 1세)의 시신이 도르네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삼일 간 머물렀던 위핑타운(Weeping Town)에 입항했다. 소도시의 견고한 목재 벽 위에서 펄럭이는 깃발은 여전히 토멘 왕의 수사슴과 사자 깃발로, 적어도 여기에선 아직 철왕좌의 영장이 힘이 있음을 알렸다. "입 조심해." 아리안느는 하선하면서 동행에게 주의를 줬다. "킹스랜딩 측이 우리가 이쪽을 지난 줄 꿈에도 모르게 하는 편이 최선이야." 코닝턴 공의 반란이 진압된다면, 도르네가 아리안느를 보내 코닝턴과 그의 참칭자와 교섭하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에게 해가 미칠 터였다. 아버지가 고통으로 가르침을 준 또 다른 교훈이었다. 편은 주의 깊게 고르고, 이길 수 있는 쪽일 때에만 선택해라.

 

작년에 비해 가격이 다섯 배나 뛰긴 했지만 말을 사는 데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늙긴 했지만 건강해요." 마부가 주장했다. "스톰스엔드 쪽에선 이보다 좋은 말을 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핀의 병사들이 마주치는 모든 말이랑 노새를 빼앗아 가서 말이죠. 황소도 마찬가지고요. 몇몇은 값을 지불하라 요구하면 종이에 도장을 찍어주겠지만 당신네들 배를 갈라버리고 내장으로 값을 치를 놈들도 있지요. 그런 놈들하고 마주치면 입 다물고 그냥 말을 내주십쇼."

 

소도시는 여관이 세 개 있을 만큼 컸고, 모든 여관의 휴게실에서 무성한 소문이 돌았다. 아리안느는 여관마다 남자들을 보내 들을 수 있는 걸 듣게 했다. 다에몬 샌드는 '부서진 방패'에서 바다에서 온 침략자들이 홀프오브맨(Holf of Men)에 위치한 대성소를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처녀 섬의 모원에서 지내던 어린 수련 수사 백 명이 노예로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조스 후드는 '아비새'에서 위핑타운의 오십 명 되는 성인 남자와 소년들이 그리핀스루스트의 존 코닝턴에게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떠났으며 그중에는 나이 든 화이트헤드 공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젊은 아담 경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 페더스는 '취한 도르네인'이라는 적절한 이름이 붙은 여관에서 사람들이 그리핀이 붉은 로넷의 동생을 처형했으며 로넷의 처녀 여동생을 강간했다는 말을 쑥덕이는 걸 들었다. 로넷 자신은 남동생의 죽음과 여동생의 불명예를 복수하기 위해 남쪽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그날 밤 아리안느는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아버지에게 알리기 위해 도르네로 처음 까마귀들을 날려 보냈다. 다음 날 그녀의 일행은 막 떠오른 해가 위핑타운의 뾰족한 지붕과 구부러진 골목 위로 비스듬히 내려쬐는 가운데 미스트우드로 향했다. 푸른 들판과 작은 마을들을 지나 북쪽으로 지나고 있던 아침나절경에는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싸움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지만, 바퀴 자국 패인 길을 따라가는 여행객들은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고, 마을의 여자들은 그들을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면서 아이들을 곁에 붙잡아 두었다. 더 북쪽으로 가자 들판이 완만한 구릉과 오래된 울창한 숲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길은 흔적만 남은 모습으로 줄어들었고, 마을도 점점 적어졌다.

 

개울과 강이 어두운 숲 속으로 흐르며 진흙과 썩어가는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땅을 가진 축축한 녹색 세계인 비 숲(Rainwood)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졌다. 아리안느가 봐온 것 중에 가장 거대한 버드나무가 물줄기를 따라 자라났다. 두꺼운 줄기는 노인의 얼굴처럼 옹이 투성이에 뒤틀렸으며 은색 이끼 수염으로 장식된 나무들이었다. 나무들은 사방에 모여 자라서 해를 가렸다. 솔송나무와 붉은 향나무, 흰 떡갈나무, 탑처럼 높고 곧게 선 병정소나무, 거대한 파수목, 큰잎 단풍나무, 삼나무, 지렁이나무(wormtree), 심지어는 이곳저곳에 야생 영목까지 있었다. 영목의 뒤틀린 가지 아래로는 양치식물과 꽃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줄고사리, 참새발고사리, 초롱꽃과 파이퍼레이스(piper’s lace), 저녁별과 독입맞춤, 우산이끼, 자초, 붕어마름. 나무뿌리 사이로는 버섯이 다닥다닥 자라났고 비를 움켜쥔 창백한 얼룩 손인 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무들은 녹색이나 회색 혹은 끝이 붉은 이끼에 뒤덮여 있었고 한 번은 선명한 자주색 이끼에 덮인 나무도 있었다. 모든 돌과 바위가 이끼에 뒤덮였다. 썩어가는 통나무 옆에선 버섯이 곪아 터졌다. 숲의 공기마저 녹색처럼 보였다.

 

아리안느는 언젠가 아버지와 칼레오트 학사가 왜 도르네해의 북쪽과 남쪽이 그렇게 서로 다른지에 대해 성사와 논쟁을 벌이는 걸 들은 적 있었다. 성사는 그것이 첫 번째 폭풍왕, 바다 신과 바람 여신의 딸을 훔쳐내서 그들의 영원한 분노를 산 '신의 고뇌' 듀란 때문이라고 했다. 도란 대공과 학사는 바람과 물에 더 집중해서 아래 여름해에서 형성된 큰 폭풍이 어떻게 북쪽으로 이동하며 래스곶에 부딪힐 때까지 습기를 흡수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이상하게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폭풍은 한 번도 도르네를 강타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던 게 기억났다. "그 이유를 알지요." 성사는 그리 답했었다. "도르네인은 두 신의 딸을 훔친 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동 속도가 도르네에서보다 훨씬 느렸다. 그들은 제대로 된 도로 대신 이쪽저쪽으로 구부러진 뱀처럼 난 기울어진 틈과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바위와 블랙베리 나무로 파묻힌 좁고 깊은 골짜기를 타고 말을 말렸다. 때때로 길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거나 양치류 사이로 사라져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아리안느 일행은 침묵하는 나무들 사이에서 알아서 길을 찾아야 했다. 여전히 가벼운 비가 꾸준히 내렸다. 물기가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주위에 가득했고, 몇 킬로미터마다 작은 폭포가 만들어내는 음악이 들렸다.

 

숲에는 동굴도 가득했다. 첫날밤 그들은 습기를 피해 동굴 중 하나를 피난처로 삼았다. 도르네에선 달빛이 바람에 날리는 모래를 은빛으로 물들이는 밤에 이동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비 숲은 늪과 골짜기, 패인 구멍이 너무 많았고 나무들 아래론 칠흑같이 검어서 달은 단지 추억에 지나지 않았다.

 

페더스가 불을 지펴서 게리발드 경이 길가에서 딴 야생 양파와 버섯과 함께 잡아온 토끼 한 쌍을 요리했다. 식사가 끝난 뒤 엘리아 샌드는 나뭇가지와 마른 이끼를 엮어 횃불로 만들고서 동굴의 더 깊은 곳을 탐험하러 갔다. "너무 멀리 가지 않게 조심해. 어떤 동굴은 엄청 깊어서 길 잃기 딱 좋으니까." 아리안느는 엘리아에게 말했다.

 

공녀는 다에몬 샌드에게 또 시바스 게임 한 판을 졌고, 조스 후드에게선 한 판을 이겼다. 그 뒤엔 둘이 제인 레이디브라이트에게 규칙을 가르쳐주기 시작했고, 아리안느는 물러났다. 그런 게임은 질렸다.

 

지금쯤이면 님하고 티엔이 킹스랜딩에 도착했을지도 몰라. 그녀는 동굴 입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렇지 않더래도 곧 도착하겠지. 삼백 명의 노련한 창이 그들과 함께 떠나서 뼈의 길과 서머홀의 폐허를 지나 킹스로드에 올랐다. 만약 라니스터가 킹스우드에서 자기네의 작은 덫을 발동시키려 했다면 니메리아 아가씨가 그걸 재앙으로 끝맺었을 것이다. 살인자들이 먹잇감을 찾지도 않았으리라. 트리스탄 공자는 미르셀라 왕녀를 눈물로 이별한 뒤 선스피어에 안전하게 남았다. 그건 동생 하나 얘기지. 아리안느는 생각했다. 하지만 쿠엔틴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핀과 함께가 아니라면? 드래곤 여왕과 결혼했을까? 쿠엔틴 왕이라. 여전히 바보같이 들렸다. 이 새로운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은 아리안느보다 여섯 살은 어렸다. 그 또래의 처녀가 아리안느의 따분한 책벌레 동생을 원할까? 소녀들은 늘 의무를 다하는 엄숙한 소년이 아니라 못된 미소를 지닌 늠름한 기사를 꿈꾸는 법이었다. 그래도 도르네는 원하겠지. 철왕좌에 앉기를 바란다면 선스피어를 가져야 하니까. 만약 쿠엔틴이 그 값이라면 이 드래곤 여왕은 값을 치르리라. 혹시 대너리스가 코닝턴과 함께 그리핀스엔드에 있고 다른 타르가르옌에 대한 이 모든 건 그냥 영리한 계략이었다면? 아리안느의 남동생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쿠엔틴 왕. 쿠엔틴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까?

 

궁금해해 봤자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쿠엔틴은 왕이 됐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대너리스가 쿠엔틴을 자기 친오빠보다는 더 상냥하게 대하길 기도해야지.

 

잘 시간이었다. 내일 달려야 할 길이 멀었다. 아리안느는 자리에 누웠을 때에야 비로소 엘리아 샌드가 모험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다면 그 애 언니들이 날 일곱 가지 다른 방법으로 죽일 거야. 제인 레이디브라이트는 엘리아가 동굴 밖을 나서지 않았다고 맹세했다. 그렇다면 아직도 저기 어딘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는 소리였는데,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자 횃불을 만들어 수색에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동굴은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훨씬 깊었다. 아리안느 일행이 잠자리를 꾸리고 말을 묶어둔 입구 너머로 양옆에 검은 구멍을 낀 구불구불한 통로가 줄줄이 아래 아래로 이어졌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벽이 다시 넓어졌고, 수색자들은 성의 대연회장보다 큰 거대한 석회암 동굴에 있게 되었다. 그들의 외침이 박쥐 둥지를 거슬리게 했는지, 박쥐들이 주위에서 시끄럽게 날아다녔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득한 메아리밖에 없었다. 홀을 천천히 한 번 돌자 길 세 개가 나왔는데, 하나는 너무 작아서 들어가려면 무릎으로 기어야 했다. "다른 쪽부터 찾아보자." 공녀는 말했다. "다에몬, 나랑 가. 게리발드, 조스, 너희는 다른 쪽으로 가봐."

 

아리안느가 고른 길은 30미터를 못 가서 가파르고 축축해졌다. 발디딤이 불안정해졌다. 한 번은 발이 미끄러져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몸을 붙잡아야만 했다. 그녀는 한 번 넘게 돌아가는 걸 고려했지만, 앞에서 다에몬 경이 횃불을 들고 엘리아를 부르는 게 들렸기에 계속 나가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는 지난번 동굴보다 다섯 배는 크고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또다른 동굴에 있게 되었다. 다에몬 샌드가 그녀 곁으로 와서 횃불을 들어 올렸다. "돌이 조각된 모습을 봐." 그가 말했다. "저 기둥들, 그리고 저기 있는 벽. 보여?"

 

"얼굴들." 아리안느가 말했다. 슬픈 눈이 너무 많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

 

"여긴 숲의 아이들에게 속했던 곳이야."

 

"천 년 전에." 아리안느는 고개를 돌렸다. "들어봐. 조스인가?"

 

그랬다. 다른 수색자들이 엘리아를 찾았는데, 아리안느와 다에몬은 미끄러운 경사로를 올라 첫 번째 동굴로 되돌아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리발드와 조스가 간 길은 잔잔한 검은 웅덩이로 통했는데, 거기에 연기를 뿜으며 붉게 타오르는 횃불을 모래에 묻어두고 허리까지 물에 잠겨서 맨손으로 눈먼 흰색 물고기를 잡는 여자애가 있었다.

 

"죽었을 수도 있었어." 아리안느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말했다. 그녀는 엘리아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만약 그 횃불이 다 타버렸으면 넌 장님처럼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을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물고기를 두 마리 잡았어요." 엘리아 샌드가 말했다.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아리안느는 다시금 말했다. 그녀가 뱉은 말이 동굴 벽에 메아리쳤다.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공녀는 나중에 동굴 입구까지 올라오고 분노가 가라앉은 뒤  소녀를 옆으로 데려가 앉혔다. "엘리아, 이런 짓은 이제 그만해야 해. 여긴 도르네가 아니야. 넌 자매들하고 있는 게 아니고, 이건 게임이 아니야. 우리가 안전하게 선스피어로 돌아가기 전까지 시녀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약속을 들어야겠다. 온순하게 복종해. 입 좀 다물고. 앞으론 랜스 숙녀니 마상창시합이니 같은 소리는 하지 마, 아버지나 자매들 얘기도 그만해. 내가 만나야 할 남자는 용병들과 함께 있어. 오늘은 자칭 존 코닝턴이라는 사람을 따르지만, 내일은 쉽게 라니스터로 갈아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용병의 마음은 황금만 있으면 얻을 수 있고, 캐스털리 록엔 황금이 부족하지 않지. 만약 나쁜 사람이 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면 잡아서 몸값을 받아내려고-"

 

"아뇨." 엘리아가 끼어들었다. "그 사람들이 몸값을 받아내고 싶어 할 사람은 언니죠. 도르네의 후계자니까. 난 그냥 서녀고요. 언니 아버지는 언니를 위해 황금 궤짝을 내주겠지만 내 아버지는 죽었어요."

 

"돌아가셨지만 잊히진 않았지." 아리안느는 인생의 절반 동안 오베린 공자가 아버지였으면 하고 바랐다. "넌 모래뱀이고, 도란 대공께선 너희 자매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어떤 값이든 치르실 거야." 적어도 그 말을 듣자 아이가 미소 짓긴 했다. "맹세하겠니? 아니면 널 돌려보내야 할까?"

 

"맹세해요." 기쁜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뼈에 걸고."

 

"아버지의 뼈에 걸고 맹세해요."

 

맹세를 지킬 거야. 아리안느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는 사촌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자라고 보냈다. 어쩌면 엘리아의 모험이 가져온 득이 있을지도 몰랐다. "쟤가 얼마나 야생적인지 이제야 알았어." 나중에 아리안느는 다에몬 샌드에게 그렇게 불평했다. "왜 아버지가 굳이 나한테 맡기셨을까?"

 

"복수?" 기사가 웃으면서 답했다.

 

그들은 사흘째 되는 날 늦은 시간에 미스트우드에 도착했다. 다에몬 경이 조스 후드를 먼저 보내서 현재 성을 점거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오게 했다. "성벽 위로 스무 명이 걸어 다니는데, 더 많을지도요." 조스는 돌아와서 그렇게 보고했다. "수레랑 마차가 많아요. 잔뜩 싣고 들어가서 빈 채로 나갑니다. 모든 문에 위병을 세웠고요."

 

"깃발은?" 아리안느가 물었다.

 

"황금색. 정문이랑 아성 위로."

 

"새겨진 건 뭐였지?"

 

"바람이 없어서 못 봤습니다. 축 늘어져만 있어서."

 

성가셨다. 황금 용병단의 깃발은 다른 장식 없는 금색 천이었지만... 바라테온 가문의 깃발도 금색이었다. 그들의 깃발에는 스톰스엔드의 왕관 쓴 수사슴이 그려져 있었지만. 축 늘어진 금색 깃발은 둘 중 어느 쪽이던 가능했다. "다른 깃발도 있었나? 은회색이라던가?"

 

"제가 본 건 모두 금색이었습니다, 공녀님."

 

아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트우드는 메르틴스 가문의 권좌였는데, 그들의 문장은 회색 바탕에 흰색 수리부엉이었다. 만약 조스의 말대로 그들의 깃발이 날리고 있지 않다면 성이 존 코닝턴과 그의 용병들 손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위험을 감수해야겠어." 그녀는 일행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신중함은 분명 도르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젠 인정하게 됐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숙부의 대담함이었다. "성으로 간다."

 

"마르텔 가문의 깃발을 들까요?" 조스 후드가 물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리안느는 답했다. 대부분의 경우 공녀임을 드러내면 도움이 됐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성문에서 8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징 박힌 가죽조끼를 입고 강철 반투구를 쓴 남자 셋이 나무 뒤에서 나와서 길을 막았다. 두 명은 장전된 석궁을 들었다. 세 번째 남자는 기분 나쁜 웃음 외엔 무기가 없었다. "어딜 가시나, 예쁜이들?" 그가 물었다.

 

"네 대장을 만나러 미스트폴로 간다." 다에몬 샌드가 답했다.

 

"좋은 대답이구만." 헤벌쭉 웃는 남자가 말했다. "우리랑 가자고."

 

미스트폴의 새 용병 대장들은 자신들을 젊은 존 머드와 쇠사슬이라고 했다. 둘 다 기사라고 했지만 아리안느가 보기로는 행동거지가 전혀 기사 같지 않았다. 머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색과 똑같은 갈색으로 차려입었지만 귀에는 금화 한 쌍이 매달려 있었다. 천 년 전 머드 가문은 트라이던트의 왕가였지만 이쪽 머드에게서 고귀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젊다고 불릴 만큼 특별히 어린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늙은 존 머드라고 불린 그의 아버지 역시도 황금 용병단에서 복무한 모양이었으니까.

 

쇠사슬은 키가 머드의 1.5배쯤 됐고 떡 벌어진 가슴에는 어깨부터 허리까지 지나는 녹슨 쇠사슬 한 쌍이 교차했다. 머드는 장검과 단검을 찼지만 쇠사슬은 150센티짜리 쇠사슬 외에 무기가 없었다. 그 쇠사슬은 가슴에 묶은 것보다 두 배나 굵고 무거웠는데, 그는 그걸 채찍처럼 휘둘렀다.

 

둘 다 무뚝뚝하고 잔인하며 천박한 거친 남자였다. 흉터와 바람에 거칠어진 얼굴이 오랜 시간 용병단에서 복무했음을 말해주었다. "하사관들이다." 다에몬 경이 그들이 눈에 들어오자 속삭였다. "예전에 저런 부류를 알았지."

 

일단 아리안느가 이름과 온 목적을 밝히자 두 하사관은 충분히 환대를 베풀었다. "오늘 밤은 주무십쇼." 머드가 말했다. "일행분들 다 재울 침대도 있고. 아침이 되면 새 말이랑 뭐든 필요한 걸 내드립죠. 아가씨 학사는 그리핀스루스트에 새를 보내서 간다는 걸 알려도 됩니다."

 

"거기 있는 사람은 누군가?" 아리안느가 물었다. "코닝턴 공?"

 

용병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반쪽 학사요." 존 머드가 말했다. "루스트에 있는 건 그 사람입니다."

 

"그리핀은 행군 중이라." 쇠사슬이 말했다.

 

"어디로?" 다에몬 경이 물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뇨." 머드가 말했다. "쇠사슬, 입 다물어."

 

쇠사슬이 코웃음 쳤다. "도르네잖아. 몰라야 할 이유가 뭔데? 어차피 우리랑 편 먹을 거 아냐?"

 

아직 결정된 일은 아니지. 아리안느 마르텔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느꼈다.

 

그들은 이븐폴의 부엉이의 탑 높은 곳에 위치한 응접실에서 훌륭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미망인인 메르틴스 부인과 학사도 함께했다. 그 노인은 자기 성에 포로로 잡힌 신세긴 했지만 활력 넘치고 쾌활해 보였다. "내 아들놈들하고 손주들은 렌리 공이 기수를 소집했을 때 떠났답니다." 그녀가 공녀 일행에게 말했다. "그때 뒤론 본 적이 없어, 가끔씩 까마귀가 날아오긴 하지만. 손자 하나가 블랙워터에서 다쳤는데 회복했답디다. 이 도둑놈들을 목매달게 어서 돌아와 주길 바라는 중이요." 그가 식탁 너머 머드와 쇠사슬을 향해 짧은 다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도둑이 아냐." 머드가 말했다. "징발대원이지."

 

"그 식량을 돈 주고 샀었나?"

 

"징발이라니깐." 머드가 말했다. "작물이야 평민들이 또 기를 수 있겠지. 우린 네 정당한 왕을 섬긴다고, 할망구." 머드는 이 대화를 즐기는 듯했다. "기사들한테 좀 더 정중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겠구먼."

 

"너희가 기사라면 내가 아직도 처녀겠다." 메르틴스 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난 마음대로 말할 거다. 어쩔 건데, 죽이기라도 할 거냐? 어차피 너무 오래 살았으니 상관없지."

 

아리안느 공녀가 말했다. "저들이 잘 대해주던가요, 부인?"

 

"강간당하진 않았어요, 묻는 게 그거라면." 나이 든 여인이 말했다. "하녀 몇은 그만큼 운이 좋질 못했지만. 결혼을 했건 안 했건 남자들은 구분하질 않으니."

 

"아무도 강간한 적 없어." 젊은 존 머드가 주장했다. "코닝턴은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아. 우린 명령을 따른다."

 

쇠사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애 몇몇이 허락했는지도 모르지."

 

"평민들한테서 작물을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는 거랑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했겠지. 멜론이든 처녀성이든 너희 같은 놈들에겐 다 똑같으니까. 원하면 그냥 취하지." 메르틴스 부인이 아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그 코닝턴 공이라는 작자를 만나게 된다면 내가 그 사람 어머니를 안다고 말해요, 모친이 부끄러워하셨을 거라고."

 

그래야 할지도. 공녀는 생각했다.

 

그날 밤 아리안느는 아버지에게 두 번째 까마귀를 날렸다.

 

침실로 돌아가던 중 아리안느는 옆에 붙은 방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잠시 소리를 듣다가 문을 열어젖혔다. 엘리아 샌드가 창가 자리에 웅크리고 페더스와 입 맞추고 있었다. 문가에 서 있는 공녀를 발견한 페더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둘 다 옷은 입고 있었다. 아리안느는 거기에서 작은 위안을 받고 날카로운 눈빛과 "나가"한 마디로 페더스를 내보냈다. 그리고선 엘리아에게로 몸을 돌렸다. "페더스는 네 나이의 두 배는 돼. 하인이고. 학사를 위해 새똥을 치운다고. 엘리아,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입 맞추기밖에 안 했어요. 페더스하고 결혼할 것도 아니고." 엘리아가 반항적으로 팔짱을 꼈다. "지금까지 남자애 하고 입맞춤도 안 해봤을 것 같아요?"

 

"페더스는 애가 아니라 남자야." 하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자지. 공녀는 자신이 다에몬 샌드에게 처녀성을 준 나이가 지금 엘리아의 나이와 같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난 네 어머니가 아니지. 도르네에 돌아가면 하고 싶은 만큼 맘껏 입 맞추고 놀아. 하지만 지금 여기선... 여기선 그럴 수 없어, 엘리아. 온순하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했었지. 순결하게 지내겠다는 것까지 덧붙여야 할까? 아버지의 뼈에 걸고 맹세했었잖아."

 

"기억해요." 잘못을 깨달은 목소리였다. "온순하게 복종한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비 숲의 축축한 녹색 심장을 거쳐 가는 것이 미스트우드에서 그리핀스루스트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는데, 가장 여건이 좋을 때조차 천천히 갈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아리안느 일행은 거의 8일이 걸렸다. 그들은 저 위에서 나무 꼭대기를 끊임없이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동했지만 놀랍게도 커다란 녹색 나뭇잎과 나뭇가지들 아래에서 달리자니 하나도 젖지 않았다. 북쪽으로 향하는 첫 4일간은 쇠사슬이 수레를 줄줄이 대동하고 병사 열 명과 함께 동행했다. 쇠사슬은 머드가 없으니 떠벌리는 말이 늘었고, 아리안느는 그를 부추겨 인생사를 끌어낼 수 있었다. 쇠사슬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은 레드그래스 벌판에서 검은 드래곤과 함께 싸우고 비터스틸과 함께 협해를 건넌 고조부였다. 쇠사슬 본인은 용병단에서 용병과 종군 매춘부 사이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스스로를 웨스테로스인이라고 여기고 공용어를 배우며 자랐지만 여태껏 칠왕국 땅을 밟아 본 적이 없었다.

 

슬픈 이야기야, 익숙하기도 하고. 아리안느는 생각했다. 쇠사슬이 싸웠던 수많은 장소들과 그가 상대하고 죽인 적들, 그러면서 입은 상처들이 그의 인생이었다. 공녀는 쇠사슬이 이야기하게 두면서 때때로 웃음이나 손길로, 혹은 질문을 하거나 감명받은 척을 해서 그가 중요한 얘기를 털어놓게 유도했고, 머드의 주사위 굴리는 실력이나 '두 개의 검'과 그가 좋아하는 빨간 머리 여자, 누군가가 해리 스트릭랜드가 가장 아끼는 코끼리를 훔쳐 달아났을 때, 겁쟁이 꼬마와 그의 운 좋은 고양이에 대해서, 그리고 황금 용병단의 병사와 장교들의 장단점에 관해 온갖 자질구레한 사실을 다 듣게 되었다. 하지만 네 번째 날 방심한 쇠사슬은 결국 "...스톰스엔드를 점령하고 나면..."이라고 흘리고 말았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말이었지만 공녀는 언급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스톰스엔드라. 이 그리핀은 용감하네. 아님 바보던가. 삼백년 동안 바라테온 가문의 권좌였으며 그 전에는 수천년 간 고대 폭풍왕들에게 속했던 스톰스엔드는 몇몇 사람들에겐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렸다. 아리안느는 왕국에서 가장 튼튼한 성이 어디인지에 대해 남자들이 논쟁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몇몇은 캐스털리 록을 댔고, 몇몇은 아린의 이어리, 또 누구는 얼어붙은 북쪽의 윈터펠을 얘기했지만, 스톰스엔드 역시 늘 빠지지 않고 언급됐다. 전설에 따르면 건설자 브랜던이 복수심에 불타는 신의 분노를 견뎌낼 성으로 스톰스엔드를 지었다고 한다. 스톰스엔드의 외벽은 두께가 12미터에서 24미터로 칠왕국을 통틀어 가장 높고 튼튼했다. 창문 없는 거대한 주탑은 높이는 올드타운의 하이타워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대신 성벽은 세 배 두께에 달했다. 어떤 공성탑도 스톰스엔드의 흉벽에 미칠 만큼 높지 못했다. 망고넬이나 트레뷰셋이 있더라도 그 막대한 성벽을 부수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코닝턴은 포위전을 할 생각인가? 의문이 들었다. 동원 가능한 병사는 몇이나 되지? 성을 함락시키기도 전에 라니스터가 군대를 보내 포위망을 박살 낼 터였다. 그쪽도 가망 없기는 마찬가지야.

 

그날 밤 아리안느가 다에몬 경에게 쇠사슬에게 들은 바를 말해주자 갓즈그레이스의 서자는 그녀만큼이나 당혹스러워했다.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스톰스엔드는 여전히 스타니스 공에게 충성하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고 했는데. 코닝턴이 스타니스하고도 전쟁을 벌이는 것보단 같은 반란군인 이상 동맹을 맺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스타니스는 코닝턴을 도와주기에는 너무 멀리 있어." 아리안느는 생각에 잠겼다. "영주와 수비대가 멀리 전쟁 나간 동안 자잘한 성 몇 개를 점령하는 건 그걸로 끝이지만, 만약 코닝턴 공과 코닝턴의 애완 드래곤이 어떻게든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된다면..."

 

"...왕국이 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하겠지." 다에몬 경이 말을 맺었다. "라니스터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 중에는 합류하러 올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날 밤 아리안느는 아버지에게 짧은 편지를 하나 더 써서 페더스에게 세 번째 까마귀 편에 보내라 시켰다.

 

젊은 존 머드도 새들을 날리는 것 같았다. 나흘째 되는 날, 쇠사슬과 그의 마차들이 떠난 지 오래지 않은 황혼 무렵 아리안느 일행은 그리핀스루스트에서 내려온 용병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아리안느가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이국적이었는데, 손톱에는 칠을 하고 귀에는 보석이 반짝였다.

 

리소노 마르는 공용어를 아주 잘했다. "황금 용병단의 눈과 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공녀님."

 

"굉장히..." 아리안느는 머뭇거렸다.

 

"... 여자 같다고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타르가르옌 같군." 아리안느는 그리 주장했다. 눈은 연보라색이었고, 머리채는 흰색과 금색의 폭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소름이 돋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세리스가 이렇게 생겼을까? 자문하게 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죽어서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과찬이십니다. 타르가르옌 가문의 여자들은 세계에서 비할 바 없는 미인들이었다고 하지요."

 

"타르가르옌 가문의 남자는 어떻고?"

 

"아, 그보다 예쁘고 말고요. 사실대로 고하자면 제가 본 사람은 딱 한 명뿐이지만요." 마르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손목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미스트우드에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스러운 공녀님. 루스트까지 모셔다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코닝턴 공과 저희의 젊은 왕자님은 만나 뵙지 못하겠네요."

 

"전쟁하러 나갔나?" 스톰스엔드로?

 

"그렇습니다."

 

그 리스인은 쇠사슬과는 전혀 다른 류의 사람이었다. 이쪽은 아무것도 흘리지 않을 거야. 그녀는 고작 몇 시간을 함께하고 나자마자 알아차렸다. 마르는 언변이 번지르르했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수사술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마르와 함께 온 기수들도 벙어리만큼이나 말해주는 게 없긴 마찬가지였다.

 

아리안느는 대놓고 부딪히기로 결심했다. 미스트우드에서 떠난 지 닷새째 되는 날 저녁, 덩굴과 이끼에 파묻힌 오래된 탑의 무너진 폐허 옆에 야영하러 멈췄을 때 그녀는 마르 곁에 앉아 물었다. "황금 용병단이 코끼리를 데리고 왔다는 게 사실인가?"

 

"몇 마리 있지요." 리소노 마르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드래곤은? 드래곤은 몇 마리 있나?"

 

"한 마리 있습니다."

 

"그 소년을 뜻하는 거겠지."

 

"아에곤 왕자는 성인입니다, 공녀님."

 

"날 수는 있는가? 불도 뿜을 수 있고?"

 

리스인은 웃었지만 연보라색 눈은 차가웠다.

 

"시바스 둘 줄 아는가?" 아리안느는 물었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지. 비록 실력은 부족하지만, 나도 드래곤이 코끼리보다 강하다는 건 안다네."

 

"황금 용병단을 세운 자는 드래곤이었습니다."

 

"비터스틸은 반쪽짜리 드래곤이고, 서자였어. 학사는 아닐지라도 역사는 어느 정도 아네. 자네들은 용병일 뿐이야."

 

"그 편이 마음에 드신다면요, 공녀님." 그의 예의는 여전히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저희로선 스스로를 망명자들의 자유 형제단이라 칭하기를 선호합니다만."

 

"그러겠지. 자네들이 다른 용병단보다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하네. 하지만 황금 용병단은 웨스테로스로 넘어왔을 때마다 패배했다. 비터스틸의 지휘를 받았을 때 졌고, 블랙파이어 찬탈자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괴물 같은 마엘리스가 이끌었을 때 흔들렸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즐거워하는 듯했다. "적어도 저희가 끈질기다는 점만은 알아주셔야죠. 그리고 개중에는 승패가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었는걸요."

 

"몇몇은 아니었고. 그리고 참패해서 죽는 사람이나 접전에서 죽는 사람이나 수는 다를 바 없네. 내 아버지이신 도란 대공께선 현명하신 분이고,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만 싸우신다. 전쟁의 흐름이 너희의 드래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된다면 황금 용병단은 예전처럼 분명 협해 건너로 도망치겠지. 종울림 전투에서 로버트에게 패배한 뒤 코닝턴 공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도르네는 그렇게 도망칠 곳이 없네. 왜 우리가 너희의 불확실한 대의에 검과 창을 빌려주어야 하는가?"

 

"아에곤 왕자께선 공녀님의 핏줄입니다. 라에가르 타르가르옌 왕세자와 공녀님의 고모 되신 도르네의 엘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지요."

 

"대너리스 타르가르옌도 도르네의 핏줄이긴 마찬가질세. 아에리스 왕의 딸이고, 라에가르의 여동생이니. 그리고 대너리스에겐 드래곤들이 있다, 적어도 소문이 그렇게 믿게 만들었지." 불과 피. "대너리스는 어디에 있나?"

 

"세상 절반을 가로질러 노예상만에 있지요." 리소노 마르가 답했다. "그 소문 무성한 드래곤으로서 얘기하자면,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시바스에선 드래곤이 코끼리보다 강력한 말이긴 하지요. 전쟁터에선, 저라면 말과 소원으로 만들어진 드래곤보다는 제가 보고 만지고 적군에 맞서 써먹을 수 있는 코끼리를 고르겠습니다."

 

공녀는 사색하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아버지에게 네 번째 까마귀를 보냈다.

 

그리고 가랑비가 차갑게 내리는 회색빛의 축축한 날에, 마침내 그리핀스루스트가 바다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리소노 마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나팔소리가 거석 사이로 울러 펴지더니 성문이 열렸다. 정문 문루 위에 걸린 비에 젖은 깃발은 코닝턴 가문의 흰색과 붉은색이었지만 황금 용병단의 금색 깃발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들은 십브레이커만의 파도가 양쪽에서 바위에 부딪치며 으르렁대는 와중에 '그리핀의 목'이라고 알려진 다리를 두 줄로 지났다.

 

성 안으로 제대로 들어오자 도르네 공녀를 환영하기 위해 황금 용병단의 하사관 십여 명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리소노 마르가 그들을 소개하는 동안 그들은 아리안느 앞에 차례로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대부분의 이름들은 듣자마자 머리에서 흘러나갔다.

 

그들 중 으뜸 되는 사람은 날렵하고 주름졌으며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을 한 나이 든 남자였는데, 긴 머리를 뒤로 매듭지어 묶었다. 이쪽은 전사가 아니야, 아리안느는 알아차렸다. 리스인이 그를 반쪽 학사 할돈이라고 소개하면서 심증을 확인시켜 주었다.

 

"공녀님과 일행분들을 위해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침내 소개가 끝나자 이 할돈이라는 남자가 말했다. "분명 안락할 겁니다. 코닝턴 공을 찾고 계신 걸 알고 있습니다, 코닝턴 공께서도 공녀님과 긴급히 얘기 나누길 희망하십니다. 원하신다면 내일 배를 타고 코닝턴 공을 뵈러 가실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게 되는 건가?" 아리안느가 질문했다.

 

"들으신 적 없으십니까?" 반쪽 학사 할돈이 단검으로 벤 자국처럼 얇고 거친 미소를 지었다. "스톰스엔드가 저희의 손에 있습니다. 수관께선 거기서 기다리십니다."

 

다에몬 샌드가 그녀 뒤에서 걸어 나왔다. "십브레이커만은 온난한 여름날에도 위험하기로 악명 높지. 육로로 가는 편이 더 안전하오."

 

"비 때문에 길이 진흙탕으로 변했소. 이틀, 어쩌면 사흘까지도 걸릴 거요." 반쪽 학사 할돈이 말했다. "배를 타시면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스톰스엔드에 도착하실 겁니다. 킹스랜딩에서 스톰스엔드로 진군 중인 군대가 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안전한 성벽 안에 계시고 싶으실 테지요."

 

그런가? 아리안느는 의문했다. "전투인가, 포위인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 갇힐 생각은 없었다.

 

"전투입니다." 할돈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에곤 왕자께서 적군을 들판에서 쳐부수려 하십니다."

 

아리안느는 다에몬 샌드와 시선을 교환했다. "친절을 베풀어 우리 방을 보여주시겠는가? 잠시 쉬면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군."

 

할돈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지요."

 

아리안느의 동행은 예첨창 너머로 십브레이커만이 내려다보이는 동쪽 탑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네 동생은 스톰스엔드에 없어, 이젠 알겠군." 문이 닫히자마자 다에몬 경이 말했다.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에게 드래곤들이 있어도 세상 절반 떨어진 곳에 있고, 도르네에겐 아무 도움도 못 돼. 스톰스엔드에 우릴 위한 건 아무것도 없어, 공녀님. 만약 도란 대공께서 널 전쟁터 한복판에 보내실 작정이었다면 기사 셋이 아니라 삼백 명을 딸려 보내셨을 거야."

 

그렇게 확신하진 말게, 경. 아버지는 기사 다섯과 학사 하나만 딸려서 내 동생을 노예상만으로 보냈으니까. "코닝턴과 얘기를 해야겠어." 아리안느는 망토를 여민 태양과 창 장식을 끌렀다, 비에 젖은 망토가 어깨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드래곤 왕자라는 사람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만약 정말로 엘리아의 아들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 아들이던간에, 만약 코닝턴이 메이스 티렐과 전면으로 맞붙게 되면 머지않아 포로나 시체가 될 거야."

 

"티렐은 두려워할 인간이 아니야. 오베린 숙부-"

 

"는 죽었어, 공녀님. 그리고 황금 용병단은 병사 만 명 가치밖에 안 돼."

 

"분명 코닝턴 공도 자기 한계를 알아. 전투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면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자신이 이길 수 있다 자신한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몇이더라?" 다에몬 경이 물었다. "거절하세요, 공녀님. 난 이 용병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스톰스엔드로 가지 마요."

 

그런 용병들이 나를 순순히 보내주긴 할 것 같아? 아리안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반쪽 학사 할돈과 리소노 마르가 내일 그녀를 스톰스엔드로 향하는 배에 태울 거라는 불안한 느낌이 있었다. "다에몬 경, 자네는 오베린 숙부의 종자였지. 만약 오베린 공자 옆이었다면 그분께도 거절하라 조언했겠는가?" 그녀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난 답을 알아. 그리고 만약 나한테 넌 붉은 독사가 아니라고 상기시킬 작정이면, 그것도 알아. 하지만 오베린 공자는 죽었고, 도란 대공은 늙고 병들었으며, 도르네의 후계자는 나야."

 

"그리고 그게 공녀님이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가선 안 될 이유지요." 다에몬 샌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신 저를 스톰스엔드로 보내십시오. 만일 그리핀의 계획이 어그러지고 메이스 티렐이 성을 되찾는대도, 전 그저 재산과 영광을 꿈꾸며 참칭자에게 검을 바친 흔한 토지 없는 기사에 불과할 테니 말입니다."

 

내가 잡힌다면, 철왕좌는 나를 도르네가 용병들과 공모해서 침략을 도왔다는 증거로 보겠지. "나를 보호하려는 시도는 용감하네, 경. 거기에 감사해." 아리안느는 다에몬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이 임무를 맡기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내일 나는 감히 드래곤을 만나러 그 소굴로 떠난다."

 

 

'고귀한 숙녀'는 녹색 땅의 귀족 숙녀처럼 뚱뚱하고 느릿한 배였다. 빅타리온은 '고귀한 숙녀'의 거대한 화물창을 무장한 남자들로 채웠다. 강철 함대가 노예상만에 오기까지 거친 오랜 항해 동안 포획한 보다 못한 상품들- 볼품없게 작은 각종 상선, 대형 상선, 무장 상선, 이곳저곳 어선이 딸린 교역용 갤리선 모두가 그녀와 함께 항해할 것이다. 비대하면서도 허약한 함대였다. 양모와 와인, 다른 교역품을 실었다고만 여기겠지 위험이 담겼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리라. 빅타리온은 짝귀 울프에게 그 명령을 내렸다.

 

"노예주들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돛대들을 보면 겁에 질릴지도 모르지." 그는 울프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일단 제대로 보고 나면 두려워했던 거에 웃어버릴 거다. 상인하고 어부가 다인 배들이니까. 누구나 그건 알겠지. 그놈들이 원하는 만큼 접근하게 둬, 그렇지만 준비되기 전까진 병사들은 갑판 아래에 숨겨둬라. 그 뒤 배가 가까이 붙으면 올라타서 노예는 풀어주고 노예주는 바다에 먹여, 하지만 배는 온전히 탈취해. 우릴 고향으로 태우고 갈 배란 배는 다 필요하니까."

 

"고향," 울프가 씩 웃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소식이구만요, 함대장님. 배가 먼저고- 그 뒤에 융카이 놈들을 박살낸다. 그러죠."

 

'강철 승리'호는 '고귀한 숙녀' 옆에 묶여 있었다. 쇠사슬과 갈고리가 두 배를 단단히 묶었고, 그 사이 사다리가 뻗었다. 그 대형 상선은 군함보다 훨씬 컸고 물 위로도 더 높이 떠올랐다. 뱃전마다 강철인들이 서서 빅타리온이 짝귀 울프의 어깨를 두드리고 사다리를 오르게 보내는 것을 굽어보았다.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했고, 하늘은 별들로 밝았다. 울프가 사다리를 올리라고 명령했고, 쇠사슬이 풀어지자 군함과 상선이 갈라섰다. 멀리서 빅타리온의 유명한 나머지 함대가 돛을 올렸다. '강철 승리'호의 선원들이 거친 함성을 터뜨리자 '고귀한 숙녀'에 탄 남자들이 마주 외침으로 답했다.

 

빅타리온은 울프에게 최고의 전사들을 내어주었고,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처음으로 도끼를 휘두르고 적군의 눈에 서린 공포를 처음으로 목도하는 사람이 되리라. '강철 승리'호의 뱃머리에 서서 짝귀의 상선들이 하나둘씩 서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처음으로 베었던 적의 얼굴들이 빅타리온 그레이조이에게 떠올랐다. 그는 첫 번째로 가졌던 배, 첫 번째로 가졌던 여자를 생각했다. 새벽, 그리고 오늘이 가져올 것들에 대한 굶주림이 그를 안달나게 했다. 죽음이던 영광이던, 오늘 둘 모두로 갈증을 채우겠어. 발론이 죽은 뒤, 해석좌는 그의 것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형인 유론이 오래 전 그의 아내를 빼앗아 갔듯 해석좌도 빼았았다. 내 아내를 훔치고선 더럽혔는데, 죽이는 건 나한테 떠넘겼지.

 

하지만 그 모든 건 이미 일어난 일, 지난 일이었다. 빅타리온은 마침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쥐게 되리라. 내겐 나팔이 있어. 그리고 그 여자도 곧 가지게 될 거야. 유론이 내가 죽이게 만든 아내보다 더 사랑스러운 여자.

 

"선장님." 롱워터 파이크의 목소리였다. "노잡이들이 선장님을 기다립니다."

 

세 명이었고 다들 튼튼한 놈이었다. "내 선실로 보내라. 사제도 보내."

 

노잡이들은 셋 다 덩치가 컸다. 하나는 소년, 하나는 깡패, 하나는 서자의 사생아였다. 소년은 일 년 못 되게 노를 저었고, 깡패는 이십 년을 그리 보냈다.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었지만 빅타리온은 알지 못했다. 하나는 '비탄', 하나는 '새매', 하나는 '거미의 입맞춤'에서 왔다. 강철 함대에서 노를 한 번이라도 잡아본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팔을 보여줘라." 세 노잡이가 그의 선실로 들어오자 그가 명령했다.

 

모쿼로가 나팔을 들고 왔고, 어스름 여인이 등불을 들어 올려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 일렁이는 등불 빛 아래서 지옥 나팔은 마치 사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뱀처럼 뒤틀리는 듯했다. 모쿼로는 배가 크고 어깨가 넓고 키가 우뚝했지만 그렇게 괴물처럼 큰 남자의 손에서도 나팔은 거대해 보였다.

 

"내 형이 발리리아에서 이 물건을 찾았다." 빅타리온은 노비들에게 말했다. "이만한 거 두 개를 머리에 얹었을 드래곤이라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해 봐. 바가르나 메락세스, 검은 공포 발레리온보다 컸을 거다." 그는 모쿼로에게서 나팔을 받아 들고 곡선을 따라 손을 쓸었다. "올드윅에서 열린 킹스무트에서, 유론의 벙어리 중 하나가 이 나팔을 불었다. 기억나는 사람도 있겠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소리였으니까."

 

"나팔을 분 남자는 죽었다던데요." 소년이 말했다.

 

"그래. 분 뒤 나팔에서 연기가 났지. 벙어리는 입술에 물집이 잡혔고, 가슴에 새긴 문신 새에선 피가 흘렀다. 다음 날 죽었고. 가슴을 갈라보니 폐가 검은색이었다는군."

 

"이 나팔은 저주받았어요." 서자의 사생아가 말했다.

 

"발리리아에서 건진 드래곤 나팔." 빅타리온이 말했다. "그래, 저주받았지. 아니라 한 적 없다." 적금색 띠를 쓸자 나팔에 새겨진 고대 상형문자가 손가락 끝에서 노래하는 듯했다. 찰나 동안 그는 나팔을 직접 불고 싶다는 거센 욕망에 휩싸였다. 이처럼 귀하고 강력한 물건을 나에게 주다니, 유론이 멍청한 짓을 했지. 이 나팔로 해석좌를 차지할 거야, 그다음엔 철왕좌까지. 이 나팔로 세상을 가지겠어.

 

"클래곤은 나팔을 세 번 불었고 그것 때문에 죽은 거다. 너희 못지않게 덩치가 컸고 나만큼이나 강했지. 맨손으로 사람 머리를 어깨에서 뜯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는데도 나팔을 불자 죽었다."

 

"그럼 우리도 죽겠군요." 소년이 말했다.

 

평소 빅타리온은 노비가 버릇없이 끼어드는 걸 눈감아 주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소년은 스무 살도 채 안 된 데다 무엇보다 곧 죽을 목숨이었으니 그냥 넘어갔다.

 

"그 벙어리는 나팔을 세 번 불었지. 너희는 한 번씩만 한다.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은 죽는다. 강철 함대는 전투를 향해 항해 중이고, 많은 수가 해가 떨어지기 전 죽을 거다. 칼에 찔려서, 베여서, 배가 갈려서, 익사해서, 산채로 불타서-오직 신들께서만 우리 중 누가 내일까지 남아있을지 아신다. 나팔을 불고 살아남는다면 너희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겠다. 아내도 주고, 땅도 조금 주고, 항해할 배와 부릴 노비를 주마. 남자들이 네 이름을 기억하게 될 거다."

 

"함대장님까지도요?" 서자의 사생아가 물었다.

 

"그래."

 

"그럼 하겠습니다."

 

"저도요." 소년이 말했다.

 

깡패가 팔짱을 끼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서 더 용감해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노비일 뿐이었으니, 빅타리온은 그들이 뭐라 믿던 신경 쓰지 않았다.

 

"너희는 '강철 승리'를 타고 나와 함께 간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아. 소년, 네가 제일 어리지- 네가 첫 번째로 나팔을 분다. 때가 되면 나팔을 길고 크게 불어라. 듣자니 힘이 좋다더군. 서 있지도 못하게 될 때까지, 마지막 숨까지 쥐어짜내서 폐가 불타오를 때까지 나팔을 불어라. 미린의 해방 노예, 융카이의 노예주, 아스타포의 유령들까지 모두 네 나팔 소리를 듣게 만들어. 삼나무 섬까지 나팔 소리가 울리게 해서 원숭이들이 똥을 지리게 만들어 버리라고. 그 뒤엔 다음 사람에게 나팔을 넘겨라. 알아들었어? 뭘 해야 할지 알겠느냐?"

 

소년과 서자의 사생아가 머리를 조아렸다(tugged their forelocks). 깡패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대머리였으니까.

 

"나팔을 만져봐도 좋다. 그럼 가봐."

 

노잡이들은 하나씩 떠났다. 노비 셋, 그리고 모쿼로. 빅타리온은 그가 지옥의 나팔을 차지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필요할 때까지 여기 내 옆에 두겠다."

 

"명하신 대로요. 피를 내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빅타리온은 어스름 여인의 팔목을 붙잡고 모쿼로에게 밀었다. "이 여자가 한다. 가서 네 붉은 신한테 기도해. 불을 지피고 뭐가 보이는지 말해라."

 

모쿼로의 검은 눈이 빛나는 듯했다. "드래곤들이 보입니다."

 

 

 

밤의 어둠을 틈타 죽은 자들이 도시의 거리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보다 무르익은 시체들은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난 뒤, 벽돌에 떨어질 때 폭발해서 벌레와 구더기 그리고 그보다 끔찍한 것들을 흩뿌려놓았다. 다른 시체들은 피라미드와 탑의 벽면을 맞고 튕겨 나가서 부딪힌 자리에 선혈로 번들거리는 자국을 남겼다.

 

융카이의 트레뷰셋은 거대하긴 했지만 도시 깊숙한 곳까지 소름 끼치는 발사물을 던질 사거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체는 성벽 바로 안쪽에 떨어지거나 망루, 난간, 방어탑을 때리는 데 그쳤다. '여섯 자매(*융카이군의 트레뷰셋 여섯 대를 가리키는 별칭)'가 미린을 초승달 대형으로 둘러싼 가운데, 도시의 모든 곳이 타격을 받았으나 북쪽의 강 구역에는 해가 미치지 않았다. 어떤 트레뷰셋도 스카하자단 강을 넘어서까지 시체를 던질 순 없었다.

 

작은 자비지. 바리스탄 셀미는 미린의 서쪽 대문 안에 위치한 시장 광장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대너리스가 미린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배의 돛대로 '조소의 남근'이라는 충차를 만들어서 바로 그 문을 부쉈었다. 대단한 주인과 그자들의 노예 군대는 이곳에서 그들과 맞서 싸웠고, 전투는 주변 거리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었다. 도시가 마침내 함락되었을 때는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수백이 광장에 널브러져 있었다.

 

광장은 다시금 살육의 현장이 되었지만, 이번에 죽은 자들은 하얀 암말을 타고 왔다. 낮에 미린의 벽돌길은 오십 가지 색으로 빛났지만, 밤이 길을 무채색의 조각보로 바꿔놓았다. 최근 내린 비로 인해 생긴 웅덩이들엔 횃불 빛이 일렁였고 남자들의 투구와 흉갑, 정강이받이에는 불의 선이 입혀졌다.

 

바리스탄 셀미 경은 천천히 말을 몰아 그들을 지나갔다. 늙은 기사는 여왕이 내렸던 갑옷을 입었다. 흰 법랑을 입힌 강철에 금으로 무늬를 새긴 물건이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망토는 겨울 눈처럼 새하얬고, 안장에 매달린 방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칼 드로고가 여왕과 결혼할 때 선물로 주었던 은색 암말을 타고 있었는데, 주제넘은 짓이었다. 하지만 대너리스가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함께할 수 없었기에, 바리스탄 경은 전쟁터에서 그녀의 은마라도 내보인다면 전사들에게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를 상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랐다. 그리고 그 은마는 몇 년 동안이나 여왕의 드래곤들과 함께 지냈던지라 드래곤의 존재나 그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다. 적의 말은 그럴 수 없었다.

 

세 소년이 그와 함께 달렸다. 툼코 로는 검은색 바탕에 붉게 그려진 타르가르옌 가문의 삼두룡 깃발을 들었다. '채찍' 라라크는 일곱 개의 은색 검이 금색 왕관을 둘러싸고 있는, 킹스가드의 끝이 갈라진 흰색 군기를 들었다. 붉은 양에겐 전쟁터에서 명령을 신호할, 은띠를 두른 커다란 전투 나팔을 들렸다. 그들은 또 다른 날을 싸우거나, 아니면 다시는 싸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종자가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늑대의 시간이었다. 밤 중 가장 어둡고, 가장 긴 시간. 광장에 모인 남자 중 많은 수에게 그들 생의 마지막 밤이 오늘이 될 터였다.

 

우뚝 솟은 미린의 옛 노예시장 벽 아래론 오천 명의 거세병이 열 개의 긴 줄로 늘어섰다. 그들은 각각 세 개의 창, 짧은 검, 방패를 들고 돌로 깎아낸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횃불 빛이 거세병의 청동 투구에 박힌 못을 스치고 그 아래 부드러운 뺨을 가진 얼굴을 적셨다. 시체 하나가 그들 가운데로 떨어지자 내시들은 필요한 만큼만 물러난 뒤 다시 모였다. 장교들까지도 모두 걸음을 옮겼는데, 그중 투구에 못이 세 개 박힌 회색 벌레가 으뜸이었으며 그가 맨 앞에 섰다.

 

폭풍까마귀단은 광장의 남쪽 상인의 회랑 아래 모여있었는데, 그곳은 아치 덕에 시체로부터 조금 안전했다. 바리스탄 경이 말을 달려 지나칠 때 조킨의 궁수들은 활에 줄을 감고 있었다. 홀아비는 엄숙한 얼굴로 수척한 회색 말 위에 올라 팔에는 방패를 매고 손에는 못이 박힌 전투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의 무쇠 반투구 관자놀이 부근에 있는 구멍으로 검은 깃털 뭉치가 삐져나왔다. 홀아비 옆에 있는 소년은 용병단의 기치를 움켜쥐고 있었다. 긴 장대 위로 다 해진 검은색 띠가 열댓 개 휘날렸고, 꼭대기에는 나무로 조각한 까마귀가 얹힌 깃발이었다.

 

기마군주들도 왔다. 아고와 라카로가 여왕의 작은 칼라사르 대부분을 스카하자단 너머로 데려갔기 때문에, 늙은데다 반불구인 자카 란 로모는 간신히 기수 스물밖에 모으지 못했다. 몇몇은 로모만큼 늙었고, 대다수에게 오래된 상처나 불구가 된 흔적이 있었다. 나머지는 머리를 땋을 첫 번째 종을 구하는 수염도 안 난 애송이들이었다. 그들은 '사슬 만드는 자(*기스의 신)'의 녹슨 청동상 근처에 모여 출격을 갈망하며 공중에서 시체가 떨어질 때마다 춤추듯 말을 비켜 몰았다.

 

그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 위대한 주인들이 해골의 첨탑이라고 부른 섬뜩한 기념물 근처에는 투기장 싸움꾼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셀미는 얼룩 고양이를 알아보았다. 그 옆에는 겁 없는 이소크가 있었고, 암컷 뱀 세네라, 얼룩 도살자, 카운트의 카마론, 토고스, 마리고, 미동 오를로스도 있었다. 심지어는 거인 고호르마저 와서 주변의 남자들을 소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에게도 자유가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이었던 듯했다. 투기장 싸움꾼들은 대너리스보다는 히즈다르를 사랑했지만, 그래도 셀미는 그들이 와서 똑같이 기뻤다. 몇몇은 심지어 갑옷까지 입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셀미가 크라즈를 이긴 걸 교훈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몰랐다.

 

위의 문루 흉벽은 조각보 망토를 두르고 놋쇠 가면을 쓴 남자들로 가득 찼다. 민머리는 놋쇠 짐승단을 도시 성벽으로 보내서 거세병이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만일 패배한다면 융카이에 대항해서 미린을 지키는 건 스카하즈와 그의 병사들에게 달린 일이었다... 대너리스 여왕이 돌아올 때까지.

 

돌아오신다면 말이지만.

 

도시 건너편 다른 성문에도 군대가 집결해 있었다. 탈 토라크와 그의 '충실한 방패'는 동쪽 문에 모였다. 동쪽 문은 종종 고개 문이나 키자이 문이라고 불렸다, 라자르로 향하는 여행객들은 늘 그 문을 거쳐 키자이 고갯길을 지났기 때문이다. 마르셀렌과 '어머니의 병사들'은 남쪽 황색 문, 자유 형제단과 줄무늬 등 사이먼은 강을 마주하고 북쪽 문에 위치했다. 자유 형제단이 가장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앞에 배 몇 척 외엔 적이 없었으니까. 융카이인들은 기스카인 군단 둘을 북쪽에 배치했지만, 그들은 스카하자단강 너머에 진을 쳤기에 그들 사이로 온 강과 미린의 성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융카이의 주 진영은 미린의 성벽과 노예상만의 온난한 푸른 물 사이 서쪽에 위치했다. 그들은 거기에 투석기 두 대를 배치했다. 하나는 강 옆에, 두 번째는 미린의 주 성문 반대편에. 각각 현명한 주인과 그들의 노예 병사 이십여 명의 보호를 받았다. 그 거대한 공성 무기들 사이에는 기스카인 군단 둘이 머무는 요새화한 숙영지가 있었다. 고양이 용병단은 도시와 바다 사이에서 야영했다.  적에게도 톨로스산 투석기가 있었고, 저 어둠 어딘가에 엘리리아 석궁수 삼백 명도 있었다.

 

적이 너무 많아. 바리스탄 경은 생각에 잠겼다. 그 수는 분명 우리에게 불리하겠지. 이 공격은 늙은 기사의 본능에 전부 어긋났다. 미린의 성벽은 두껍고 튼튼했다. 수비군은 그 성벽 안에서 모든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융카이 군이 쳐둔 포위선을 향해, 훨씬 강력한 적군을 향해 돌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 황소였다면 어리석다고 했으리라. 용병들도 믿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왕님. 바리스탄 경은 생각했다. 우리의 운명이 용병의 탐욕에 달리게 되었네요. 전하의 도시, 전하의 백성, 우리의 목숨... 모두 누더기 왕자의 피 묻은 손에 쥐여졌습니다.

 

최선의 희망이 헛된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셀미는 이 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알았다. 역병이 돌지 않았다면 몇 년 동안이나 융카이에 맞서 미린을 지켜냈을지도 모르지만, 하얀 암말이 미린의 거리를 질주하는 이상은 한 달도 버틸 수가 없었다.

 

노기사와 기수들이 문루로 달려오자 광장이 조용해졌다. 셀미는 말들이 내는 숨소리, 울음소리, 부스러진 벽돌 위로 강철 발굽을 긁는 소리, 병사들의 무수한 속삭임, 장검과 방패가 희미하게 짤랑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소음이 잦아들더니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침묵이 아니라 잠시의 고요, 외침 전 들이마시는 숨에 지나지 않았다. 횃불은 연기를 내며 타닥거렸고, 어둠을 일렁이는 주황색 빛으로 채웠다.

 

노기사가 쇠를 덧댄 거대한 대문의 그림자로 말을 모는 것을 보는 수천 명이 한 사람이 되었다. 바리스탄 셀미는 그에게 박힌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대장과 지휘관이 그를 마주하러 나왔다. 폭풍까마귀단의 대장 조킨과 홀아비의 빛바랜 방토 아래로 사슬 갑옷이 짤랑거렸다. 거세병의 지휘관인 회색 벌레와 믿음직한 창(Sure Spear), 개잡이(Dogkiller)는 누비 갑옷과 청동 못이 박힌 투구를 썼다. 도트락인를 대표해서는 로모, 투기장 싸움꾼의 대장으로는 카마론, 고호르, 얼룩 고양이가 나왔다.

 

"계획은 숙지하고 있겠지." 지휘관들이 모이자 백기사가 말했다. "문을 열자마자 노예 병사들을 향해 직선으로 빠르게 달려서 기병으로 선공한다. 기스카인 군단이 결집하면 쓸어버린다. 후방이나 측면에서 덮치지만 창을 시험해보진 않는다. 목표를 기억해라."

 

"트레뷰셋," 홀아비가 말했다. "융카이 놈들이 '고약한 여자'(Harridan)이라고 부르는 거. 빼앗거나, 넘어뜨리거나, 태워버린다."

 

조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는 대로 귀족을 많이 괴롭히고 그놈들 큰 천막이랑 가설물을 태운다."

 

"많이 죽이고," 로모가 말했다. "노예는 안 잡는다."

 

바리스탄 경은 안장에서 몸을 돌렸다. "고양이, 고호르, 카마론, 자네들은 보병으로 따라온다. 자네들은 무시무시한 전사로 알려져 있지. 적군에게 겁을 줘라. 고함을 지르고 소리를 쳐. 포위선에 도착할 때쯤이면 우리 기병들이 대열을 부쉈을 거다. 따라 들어가서 할 수 있는 한 많이 죽여라. 가능하다면 노예는 살려주고, 노예주, 귀족, 장교는 죽여라. 그리고 포위되기 전에 빠져나온다."

 

고호르가 주먹으로 가슴팍을 쳤다. "고호르는 도망치지 않는다. 절대."

 

그렇다면 고호르는 죽겠군. 노기사는 생각했다. 머지않아.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걸로 논쟁을 벌일 순 없었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회색 벌레가 거세병을 빼내서 진을 칠 때까지 이 공격으로 융카이군의 주의를 흩뜨려야 한다." 계획의 성공 여부는 이 부분에 달려있었다. 만약 융카이 지휘관들이 조금이라도 분별력이 있다면 내시들이 진열을 갖추기 전 가장 취약할 때 기병으로 공격할 터였다. 거세병들이 방패를 모으고 창으로 된 벽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적군 기병을 최대한 오래 막는 게 셀미의 기병대가 맡은 임무였다. "내 나팔로 신호하면, 회색 벌레는 노예주와 그 병사들을 향해  진격한다. 하나 혹은 더 되는 기스카 군단이 상대하러 나올 거다, 방패에 방패로, 창에 창으로 맞서겠지. 그 싸움은 분명 우리가 이긴다."

 

"이 몸이 들으니," 회색 벌레가 말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를 잘 듣게." 바리스탄 경이 말했다. "퇴각 신호를 들으면 물러선다. 성벽이 우리 뒤에 서 있고, 놋쇠 짐승들로 가득하다. 적군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거다, 그렇지 않았다간 석궁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니. 진격하라는 신호를 들으면 즉시 진격한다. 내 군기나 여왕님 깃발을 따라서 움직인다." 그는 툼코 로와 라라크의 손에 들린 깃발을 가리켰다.

 

홀아비의 말이 왼쪽으로 옆걸음질 쳤다. "그리고 만약 나팔이 조용해지면, 기사 경? 당신이랑 이 풋내기들이 칼에 썰리면 어떻게 하지?"

 

타당한 질문이었다. 바리스탄 경은 융카이 포위선을 첫 번째로 뚫는 사람이 될 작정이었다. 혹은 첫 번째로 죽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종종 일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내가 쓰러지면 지휘권은 자네 것이다. 자네 다음으로는 조킨, 그 다음으로는 회색 벌레가 지휘한다." 만약 모두가 죽는다면 패배한 거겠지, 라고 덧붙일 수도 있었겠으나, 모두가 아는 내용이었고 입 밖으로 낸다고 해서 듣고 싶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절대 전투 전에 패배를 입에 올리지 마라, 킹스가드 단장 하이타워 경이 세상이 젊었을 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신들께서 듣고 계실지 모르니.

 

"혹시 대장을 만나게 되면?" 홀아비가 물었다.

 

다리오 나하리스. "검을 주고 따라라." 바리스탄 셀미는 여왕의 정부에게 품은 애정이 거의 없었고 믿음은 그보다 덜했지만, 그래도 그의 용기나 무술 실력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싸우다 용맹하게 죽으면 훨씬 좋지. "더 이상 질문 없다면, 병사들에게 돌아가서 누가 됐건 섬기는 신에게 기도를 드려라. 곧 새벽이 밝는다."

 

"붉은 새벽이겠군." 폭풍까마귀단의 조킨이 말했다.

 

드래곤의 새벽이야. 바리스탄 경은 생각했다.

 

그는 일찍이 종자들이 갑옷 입는 것을 도울 때 기도를 올렸다. 그의 신들은 저 멀리 바다 건너 웨스테로스에 있었지만, 성사들이 하는 말이 진실이라면 일곱은 방황하는 자식들을 언제나 굽어살폈다. 바리스탄 경은 노파에게 병사들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그녀의 지혜를 조금 나눠주십사 하고 간청했다. 어머니에겐 쓰러졌을 경우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에겐 그의 평생을 통틀어 가장 아들에 가까운 소년들, 반쯤 훈련된 종자들을 지켜주시라고 기도했다. 마침내 그는 이방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시죠." 그는 기도했다. "황송하지만 청하건데 오늘 저와 제 병사들은 보내주시고, 대신 저희 원수들의 혼을 거두어 주십시오."

 

도시 성벽 바깥으로 멀리 트레뷰셋이 쿵 하고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 사이 내내 시체와 신체 일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하나가 투기장 싸움꾼들 사이에 떨어져 박살이 나서 뼛조각과 뇌, 살점을 보였다. 또 다른 시체는 '사슬 만드는 자'의 녹슨 청동 머리를 맞고 튀어오르더니 팔을 타고 굴러서 동상의 발치에 철퍼덕 떨어졌다. 셀미가 여왕의 은마에 올라 대기하는 곳에서 3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부풀어 오른 다리가 물웅덩이를 튀겼다.

 

"하얀 암말." 툼코 로가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어두운 눈이 검은 얼굴에서 반짝였다. 그러더니 그가 바실리스크 제도의 언어로 기도일지도 모르는 말을 읊었다.

 

적들보다 하얀 암말을 더 두려워하는군. 바리스탄 경은 깨달았다. 다른 소년들도 겁을 먹었다. 용감하긴 해도 아직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어.

 

그는 은마를 조금 돌렸다. "얘들아, 이리 모여라." 소년들이 말을 가까이 몰아오자 셀미는 입을 열었다. "너희가 지금 어떤 심정일 줄 안다. 나도 똑같은 기분을 백 번은 느껴봤어. 숨이 가쁘게 쉬어지고, 뱃속에는 공포가 차가운 검은색 벌레처럼 꼬여 있지. 방광을 비우고 싶고, 어쩌면 장도 비우고 싶은 느낌이 들 거야. 입은 도르네의 모래처럼 말라붙었고. '나가서 부끄러운 짓을 하면 어떡하지'라고 묻는 중이지? '배운 걸 다 까먹으면 어떡하지'? 영웅이 되고 싶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선 내가 겁쟁이가 아닐까 싶어 두려운 거야.

 

모든 소년이 전쟁 전날 똑같이 느낀다. 그래, 그리고 다 큰 남자들도 마찬가지야. 저기 폭풍까마귀단도 똑같이 느낀다. 도트락인들도 마찬가지고. 두려움을 느끼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두려움이 너희를 지배하게 두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때가 되면 우리 모두가 공포를 맛보게 되니까."

 

"전 두렵지 않아요." 붉은 양의 목소리는 거의 고함에 가까울 정도로 컸다. "죽는다면 라자르의 위대한 목자 앞에 서게 되겠죠, 그러면 무릎으로 그 자식 지팡이를 부러뜨리고선 말할 거예요. '세상이 늑대로 가득 찼는데, 왜 당신 백성은 양으로 만들었지?' 그 뒤엔 눈에 침을 뱉어주겠어요."

 

바리스탄 경은 미소를 지었다. "멋진 계획이구나... 하지만 저 밖에서 죽음을 구하지는 않게 조심해라, 그렇지 않았다간 분명 죽음을 찾게 될 테니 말이다. 이방인께선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시지만, 그분의 품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으니까.

 

전쟁터에서 무얼 마주하든 간에 기억해라, 모든 건 이전에도 벌어졌던 일이고, 너희보다 더 나은 남자들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다. 난 노인이고 늙은 기사다, 너희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전투를 봐 왔어. 세상에 전투만큼 끔찍한 게 없고, 전투만큼 영광스러운 게 없고, 전투만큼 우스운 게 없다. 구역질을 할지도 모른다. 첫 번째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장검, 방패, 랜스를 떨어뜨릴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짓을 했다. 무기를 주워들고 다시 싸워라. 바지에 변을 지릴지도 몰라. 나도 그랬다, 첫 번째 전투에서 말이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모든 전쟁터에선 똥 냄새가 난다. 어머니를 찾아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고, 잊었다고 생각한 신들을 찾게 될 수도 있고, 입에 올리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해본 욕을 울부짖을지도 몰라. 그 모든 것도 이미 일어난 적 있는 일이다.

 

매 전투마다 누군가는 죽는다. 그보다 많은 수는 살아남지. 동방이던 서방이던, 모든 여관과 술집에서 끊임없이 젊었을 적 무용담을 늘어놓는 수염 샌 노인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전투에서 살아남았지. 너희도 마찬가지로 살아남을 수 있어. 확신해도 좋다,  네 앞에 선 적은 그냥 또 다른 인간일 뿐이고, 틀림없이 너만큼이나 겁을 먹었을 거다. 해야만 한다면 상대를 증오하고, 할 수 있다면 사랑하되, 장검을 들어올려 내리치고 나면 계속 말을 달려라. 무엇보다도 계속 움직여야 해.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달리는 거다, 거세병이 창으로 된 벽을 만들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경?" 라라크가 킹스가드 깃발을 써서 가리켰다. 그 순간 천 쌍의 입술에서 소리 없는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도시 저편, 대피라미드의 그늘진 계단이 별 하나 없는 하늘로 240미터나 뻗은 곳에서, 하피가 섰던 자리 위로 불길이 타올랐다. 노란색 불꽃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깜빡이더니 사라졌다. 찰나 동안 바리스탄 경은 바람에 꺼진 걸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불꽃은 다시 나타났다. 더 밝고 더 맹렬하게 휘몰아치며 노랑에서 빨강 주황색으로 치솟으면서 어둠을 향해 발톱을 할퀴었다.

 

동쪽 멀리에서 새벽이 언덕 너머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또 다른 천 개의 목소리가 외쳤다. 또 다른 천 명이 신호를 보고 가리키고 투구를 쓰고 장검과 도끼를 찾았다. 바리스탄 경은 사슬이 덜그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쇠창살문이 올라가는 소리였다. 성문의 거대한 쇠경첩이 신음하는 소리가 뒤따르리라. 때가 되었다.

 

붉은 양이 그에게 날개 장식 투구를 건넸다. 바리스탄 셀미는 투구를 목가리개에 매고 방패를 팔에 조였다. 공기가 이상하리만치 달콤했다. 죽음의 가능성만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없었다. "전사께서 우리 모두를 보우하시기를." 그가 소년들에게 말했다. "공격을 알려라."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헐떡이며 깨어났다.

 

콧구멍 안으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아니면 끈덕진 악몽이었나? 또 늑대 꿈을 꿨다. 거대한 무리와 함께 먹잇감의 냄새를 쫓아 어떤 어두운 소나무 숲을 달리는 늑대의 꿈.

 

희끄무레한 빛이 방을 어둑하게 비췄다. 그녀는 떨면서 침대에 일어나 앉아 손으로 두피를 쓸어보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까슬하게 긁혔다. 이젬바로가 보기 전에 머리를 밀어야겠어. 머시(Mercy), 나는 머시야. 그리고 오늘 밤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겠지. 본명은 머세딘이었지만, 다들 머시라고들 불렀다...

 

꿈에서만 빼고. 그녀는 심장에서 울리는 울부짖음을 잠재우려 숨을 들이키면서 꿈을 더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이미 거의 잊힌 뒤였다. 그래도 피가 튀겼던 거하고 머리 위로 뜬 보름달, 달리는 동안 그녀를 지켜보던 나무는 기억이 났다.

 

그녀는 아침 햇살에 깨어날 수 있게 덧창을 젖혀뒀었다. 하지만 머시의 작은 방에 있는 창 밖으론 해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회색 안개의 벽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쌀쌀해졌다... 잘 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종일 잤을 테니. 자기가 강간당하는데 내내 자고 있다면 정말 머시다운 일일 거야.

 

다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침대보가 그녀 주위로 뱀처럼 얽혀 있었다. 머시는 침대보를 펴고, 담요를 나무 바닥에 던지고서 조용히 창가에 나체로 섰다. 브라보스는 안개에 잠겨있었다. 아래의 작은 수로를 채운 푸른색 물과 그녀가 있는 건물까지 닿은 자갈 깐 길, 이끼로 뒤덮인 다리의 아치가 보였다... 하지만 다리의 끝은 회색 안개 속에서 사라졌고, 수로 건너편 건물들은 희미한 불빛 몇 개에 불과했다. 뱀 머리 배가 다리의 중앙 아치 밑에서 나타나자 가볍게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몇 시에요?" 머시는 뱀의 들린 꼬리 옆에 서서 장대로 배를 밀고 있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장대꾼이 목소리를 좇아 고개를 들었다. "네 시다, 거인 포효로 말하자면." 그의 목소리가 소용돌이치는 푸른색 물과 보이지 않는 건물들의 벽 사이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아직 늦진 않았지만 꾸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머시는 명랑하고 성실한 일꾼이었지만 시간 약속은 자주 어겼다. 그건 오늘 밤의 변명이 되지 못할 거였다. 오늘 저녁 웨스테로스에서 온 사절이 '대문'(*Gate, 극장명)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고, 이젬바로는 아무리 웃어보인다 한들 변명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리라.

 

머시는 어젯밤 자러 가기 전 수반을 채워놨었다. 바닷물이 수조에서 묵은 끈적한 녹색 빗물보다 나았다. 그녀는 거친 천을 적셔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씻었다. 굳은살 박인 발을 닦을 때는 한쪽 다리로만 서야 했다. 그 뒤에는 면도칼을 찾았다. 대머리면 가발이 더 잘 맞는다고, 이젬바로가 그렇게 주장했다.

 

머시는 머리를 밀고 속옷을 입고 머리 위로 통짜 갈색 모직 드레스를 뒤집어썼다. 스타킹을 신을 때 보니 한 짝은 수선이 필요해 보였다. 딱딱이(Snapper)에게 도움을 청하리라. 그녀의 바느질은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의상 관리인은 보통 그녀를 불쌍히 여겼다. 아니면 옷장에서 더 나은 걸 훔쳐낼 수도 있어. 위험한 짓이긴 했다. 이젬바로는 극단원들이 그의 의상을 입고 길거리를 다니는 걸 몹시 싫어했으니까 말이다. 웬데인은 예외지만. 이젬바로의 자지를 좀 빨아주면 원하는 건 뭐든 입을 수 있다 그거지. 머시는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다에나가 경고한 바 있었다. "그 길로 빠진 여자애들은 결국 '배'(*Ship, 극장명, ='유랑극단의 배')로 가게 돼, 거기 관람석에 앉은 모든 남자들은 지갑만 두둑하다면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예쁘장한 것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지."

 

머시의 장화는 소금 자국으로 얼룩덜룩한데다 오래 신어서 갈라진 오래된 갈색 가죽 덩어리였고, 벨트는 파란색으로 물들인 삼베 줄이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끈을 베고, 오른쪽 골반 위로는 칼을, 왼쪽에는 지갑을 매달았다. 마지막으로는 어깨에 망토를 걸쳤다. 그 망토는 진짜 연극단원의 망토였다. 보라색 모직에 붉은 비단으로 안감을 댔고, 비를 막아줄 후드에 비밀 주머니도 세 개 달려 있었다. 머시는 그 주머니 중 하나에 동전 몇 개를 숨기고, 다른 주머니에는 철제 열쇠를, 마지막 주머니에는 칼을 담았다. 그건 엉덩이께에 매단 과도와는 다른 진짜 칼이었다. 하지만 그건 머시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다른 보물들과 마찬가지로. 과도는 머시의 소유였다. 머시는 과일을 먹고, 미소짓고 농담을 던지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머시, 머시, 머시." 그녀는 목제 계단을 내려가 거리에 나서며 그렇게 노래했다. 난간은 쩍쩍 갈라졌고, 계단은 가팔랐으며, 5층이나 내려가야 했지만, 그게 방을 그렇게 싸게 얻은 이유였으니까. 그거랑, 머시의 미소로 얻었지. 머시가 대머리에 깡말랐을지는 몰라도, 웃음이 예뻤고 우아함이 있었다. 이젬바로조차 머시가 우아하다고 인정했다.

 

까마귀가 날아오를 때 그녀는 '대문'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지만, 날개 다신 다리가 달린 소녀에게는 길이 더 길었다. 브라보스는 삐뚤삐뚤한 도시였다. 길은 비뚤렸고, 골목은 더 삐뚤삐뚤했고, 수로는 뒤틀림의 극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넝마주이 길을 따라 외(外)항만을 걷는 긴 길을 더 좋아했다. 거기에선 바다와 하늘이 그녀의 것이었고 대석호를 넘어 아스날, 셀라고로의 방패에 있는 소나무 비탈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부둣가를 지날 때면 타르를 칠한 이벤의 포경선, 선체가 거대한 웨스테로스 화물선에 탄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그들의 말을 항상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종종 머시는 미소로 답하고서 동전이 있다면 그녀를 '대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 긴 길을 따르자면 석조 얼굴들이 새겨진 눈의 다리도 건너야 했다. 경간 꼭대기에서 그녀는 아치 사이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진실의 전당에 얹혀진 녹색 구리 돔, 자줏빛 항만에서 숲처럼 솟아오른 돛대들, 권세가의 높은 탑들, 바다군주의 궁전 첨탑을 휘감은 꼭대기의 황금 벼락... 심지어는 짙은 청색 바다 너머로 거인의 청동 어깨마저 보였다. 하지만 그건 태양이 브라보스를 비출 때의 이야기였다. 안개가 짙을 때에는 회색 안개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 머시는 그녀의 불쌍한 갈라진 장화를 조금 덜 닳게 해줄 짧은 길을 선택했다.

 

 

엷은 안개는 그녀 앞에서 스러졌다가 그녀가 지나가면 다시금 뭉치는 듯했다. 발 아래 자갈은 젖어서 미끌거렸다. 고양이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보스는 고양이가 살기에 좋은 도시였고, 고양이는 도시 어디든 배회했다, 특히 밤에. 안개 속에선 모든 고양이가 회색이야. 머시는 생각했다. 안개 속에선 모든 사람이 살인자야.

 

머시는 여태껏 이보다 짙은 안개를 본 적이 없었다. 좀 더 넓은 운하에서는 장대꾼들이 뱀 머리 배를 서로의 배를 향해 몰고 있을 것이다,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니.

 

머시는 반대편으로 걷는 노인을 지나쳤다. 그 노인에겐 등불이 있었는데, 불빛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거리가 너무 어두워서 발을 딛는 곳조차 간신히 볼 정도였다. 도시의 보다 초라한 구역에선 주택, 상점, 창고가 마치 취한 연인처럼 서로에게 기대서 모여 있었는데, 어찌나 상층부가 바짝 붙었는지 발코니를 걸어서 넘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래의 거리는 모든 발걸음이 메아리쳐 울리는 어두운 터널이 되었다. 작은 수로는 훨씬 더 위험했는데, 그 수로들을 짠 주택들은 대개 물 위로 돌출된 화장실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젬바로는 <상인의 애수 어린 딸>에 나오는 바다군주의 연설을 읊기 좋아했다. "여기 마지막 거인이 아직 버티고 서, 형제들의 돌로 된 어깨를 밟고 우뚝 섰네." 라고. 하지만 머시가 좋아하는 건 바다군주가 금색과 보라색으로 칠한 바지선을 타고 지나갈 때 그의 머리에 뚱뚱한 상인이 똥을 싸는 장면이었다. 오직 브라보스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들 했다, 그리고 오직 브라보스에서만 바다군주와 선원 모두가 그걸 보며 함께 박장대소할 거라고. 

 

'대문'은 외항만과 자줏빛 항만 사이, 익사한 마을 끝자락 근처에 위치했다. 낡은 창고가 여기서 불탔었고 매년 땅이 조금씩 더 꺼져가서 땅값이 쌌다. 이젬바로는 침수된 돌기초 위로 동굴 같은 극장을 세웠다. '돔'과 '푸른 등불'이 좀 더 유행에 빠를진 몰라도 두 항구 사이에 위치하면 관람석을 채울 선원과 창녀가 절대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근처에 위치한 배는 이십 년 동안 정박해 있었는데도 여전히 잘생긴 관중들을 정박지로 끌어모으지 않냐고, 그리고 '대문'도 번성하게 될 거라고, 이젬바로는 자기 극단원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판단이 맞았다는 게 드러났다. '대문'의 무대는 건물이 올라가면서 기울어졌고 의상은 곰팡이가 슬기 쉬웠으며 바다뱀이 침수된 지하실에 둥지를 틀기도 했지만, 관객들로 꽉 차기만 한다면야 극단원들에겐 문제 될 게 없었다.

 

밧줄과 널빤지로 만들어진 마지막 다리는 공허로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단지 안개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머시가 달려가자 그녀의 발 밑으로 나무가 울렸다. 안개가 마치 너덜너덜한 커튼처럼 젖혀져서 극장을 드러냈다. 버터처럼 노란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왔고, 머시는 그 안에서 얘기하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입구 옆에선 브루스코가 지난 공연의 제목을 덧칠해 덮고선 그 위에 커다란 붉은 글자로 <피투성이 수관>이라고 썼다. 브루스코는 글을 못 읽는 관객을 위해 제목 어래에 피투성이 손을 그리고 있었다. 머시는 구경하려고 멈춰섰다. "멋진 손이네."

 

"엄지가 삐뚤어졌어." 브루스코가 붓으로 그림 엄지를 두드렸다. "배우들의 왕이 널 찾았는데."

 

"너무 어두워서 계속 잠만 잤어." 이젬바로가 처음 자신을 배우들의 왕이라 칭했을 때, '대문' 사람들은 경쟁자인 '돔'과 '푸른 등불'의 격노를 음미하며 거기서 못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 이젬바로는 그 칭호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젠 왕만 연기하겠단다." 마로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리고 왕이 등장하지 않는 연극이면 곧 무대에 올리지도 않을걸."

 

<피투성이 수관>에는 뚱뚱한 왕과 소년 왕, 두 명의 왕이 등장했다. 이젬바로는 뚱뚱한 왕을 맡았을 것이다. 별로 중요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누워서 죽어가면서 꽤 멋진 연설을 했고 그 전에 악마 같은 멧돼지와 눈부시게 겨루는 장면이 있었다. <피투성이 수관>의 작가는 브라보스를 통틀어 가장 피에 젖은 깃펜을 놀리는 파리오 포렐이었다.

 

머시는 극단원들이 무대 뒤편에 모여 있는 걸 보고서 지각한 게 들키질 않기를 바라며 뒤쪽에 선 다에나와 딱딱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젬바로가 안개가 끼긴 했지만 그래도 '대문'이 서까래까지 사람으로 꽉 차길 기대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웨스테로스의 왕이 배우들의 왕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사절을 보냈다." 그가 자기 극단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친애하는 웨스테로스 군주를 실망시켜선 안 되겠지."

 

"우리?" 극단원 모두에게 의상을 지어 주는 딱딱이가 말했다. "이젠 저 인간 하나 말고도 더 있는 거야?"

 

"뚱뚱해서 두 명은 충분히 되잖아요." 보보노가 속삭였다. 모든 극단엔 난쟁이가 필요했고, 보보노는 '대문'의 난쟁이었다. 그는 머시를 보자 음흉한 시선을 던졌다. "아하. 저기 있구만. 꼬마 아가씨가 강간당할 준비는 되셨을라나?" 그가 입맛을 다셨다.

 

딱딱이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조용히 해."

 

배우들의 왕은 그 짤막한 소동을 무시했다. 이젬바로는 계속 오늘 얼마나 훌륭하게 연기해야 하는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웨스테로스 사절을 빼놓더라도, 오늘 저녁 관객으로 사무관이나 유명한 코르티잔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젬바로는 그들이 '대문'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가지고 나가게 둘 생각이 없었다. "날 실망시키는 사람은 누구던 고통을 겪게 될 거다." 그는 그렇게 공언했는데, 그건 파리오 포렐이 쓴 첫 번째 작품 <드래곤군주들의 격노>에서 가린 왕자가 전투 전 날 하는 연설 대사에서 따온 거였다.

 

이젬바로가 마침내 말을 마쳤을 무렵엔 공연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때였고 극단원들은 다들 차례로 긴장해서 허둥거렸다. '대문'이 머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머시," 친구인 다에나가 애원했다. "스토크 부인이 가운 자락을 또 밟았어. 꿰매는 걸 도와줘."

 

"머시," 이방인이 불렀다. "망할 풀 가져와, 뿔이 떨어지려 해."

 

"머시," 자칭 이젬바로 대왕이 소리쳤다. "내 왕관은 어쩐 거냐? 왕관 없이 나갈 순 없어. 왕관이 없으면 내가 왕인 걸 어찌 알겠어?"

 

“머시,” 난쟁이 보보노가 끽끽댔다. “머시, 끈이 뭔가 잘못됐어. 거시기가 자꾸 튀어나온다고.”

 

머시는 끈적끈적한 풀을 가져와 이방인의 왼쪽 뿔을 다시 이마에 붙였다. 머시는 이젬바로의 왕관을 그가 늘 두는 화장실에서 찾아내고 왕관을 가발에 고정시키는 걸 도왔다. 그리고선 딱딱이가 왕비가 결혼식 장면에서 입을 금색 가운에 다시 레이스 자락을 꿰맬 수 있게 바늘과 실을 찾아 뛰어갔다.

 

그리고 보보노의 거시기는 역시나 튀어나와 있었다. 강간 장면에 쓸 수 있도록 튀어나오게 만들어진 거긴 했다. 끔찍하게도 생겼네. 머시는 분장을 고치려고 난쟁이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생각했다. 그 물건은 길이가 30센티에 굵기는 그녀 팔뚝만해서 가장 높은 발코니에서도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염색공이 가죽을 형편없이 물들여놔서 분홍색과 흰색이 얼룩덜룩했고 둥글납작한 귀두는 자두색이었다. 머시는 그걸 보보노의 바지 안으로 다시 밀어넣고 끈을 매 주었다. “머시,” 머시가 끈을 조이자 그가 노래했다. “머시, 머시, 오늘 밤 내 방에 와서 날 남자로 만들어줘.”

 

“나한테 가랑이 만져지고 싶어서 자꾸 끈 풀면 고자로 만들어버릴 거야.”

 

“우린 함께할 운명이야, 머시.” 보보노가 고집했다. “봐, 키도 딱 똑같잖아.”

 

"내가 무릎 꿇었을 때나 그렇지. 대사 첫 줄은 기억해?" 난쟁이가 무대에 술잔을 든 채 휘청거리며 오르더니 <상인의 원기 왕성한 부인>에 나오는 그럼킨의 대사로 <집정관의 번민>을 시작한 지 고작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보보노가 또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다면 이젬바로는 쓸만한 난쟁이를 찾는 게 아무리 힘들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보노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릴 거였다.

 

"우리가 뭘 공연하더라?" 보보노가 모른다는 투로 물었다.

 

놀리는 거야, 머시가 생각했다. 오늘 밤엔 안 취했어, 공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아. "칠왕국에서 온 사절을 위해서 파리오의 새 연극 <피투성이 수관>을 올리잖아."

 

"이제 기억나네." 보보노가 사악한 톤으로 목소리를 내렸다. "칠면의 신이 나를 속였도다." 그가 말했다. "순금으로 빚어진 내 고귀하신 부친, 금으로 내 형제자매를, 소년과 소녀를 만들었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음험한 것으로 만들어졌으니, 뼈와 피, 진흙이 뭉쳐 네 앞에 선 이 저속한 형상으로 일그러졌도다." 그러더니 보보노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젖꼭지를 더듬거렸다. "가슴이 없잖아. 젖통도 안 달린 애를 어떻게 강간한담?"

 

머시는 엄지와 검지 사이로 보보노의 코를 쥐고서 비틀었다. "손 떼기 전까진 안 놔준다."

 

"아오오오오." 난쟁이가 꽥 소리를 지르더니 손을 뗐다.

 

"가슴은 일이년 내로 자랄 거야." 머시가 일어나자 작은 남자 위로 우뚝 섰다. "하지만 코를 또 자라게 할 순 없다고. 나한테 손대기 전에 그걸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보보노가 연약한 코를 문질렀다. "그렇게 쑥스러워 할 거 없어. 어차피 곧 내가 널 강간할 텐데."

 

"2막 전까진 아니지."

 

"<집정관의 번민>에서 웬데인을 강간할 때면 항상 가슴을 꽉 쥐어주는데." 난쟁이가 불평했다. "웬데인은 그걸 좋아해, 관객들도 좋아하고. 관객들을 즐겁게 해 줘야지."

 

그건 이젬바로의 '지혜' 중 하나였다. 이젬바로는 그렇게 부르길 좋아했다. 관객들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고. "분명 내가 난쟁이 자지를 뜯어내고 그걸로 난쟁이 머리를 두들겨 패면 관객들도 즐거워할 걸." 머시는 대답했다. "지금껏 한 번도 못 본 거일 테니까." 항상 관객들에게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라는 것 또한 이젬바로의 또 다른 '지혜'이자 보보노가 쉬이 답할 수 없는 거였다. "됐지, 이제 끝." 머시가 선언했다. "이제 써먹을 때가 오기 전까지 바지를 잘 간수하나 보자고."

 

이젬바로가 그녀를 또 부르고 있었다. 이번엔 멧돼지 사냥용 창이 안 보인단 거였다. 머시는 창을 찾아주고, 브루스코가 멧돼지 의상을 입는 걸 돕고, 소품으로 쓰는 단검의 날을 누가 진짜 칼날로 바꿔치기 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언제 한번 '돔'에서 누가 그런 짓을 했는데, 배우가 죽었다) 그리고선 스토크 부인에게 그녀가 공연하기 전마다 마시길 좋아하는 와인을 조금 따라주었다. 마침내 "머시, 머시, 머시"를 부르짖는 외침이 잦아들자 머시는 잠깐 짬을 내 바깥을 훔쳐보았다.

 

관람석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붐볐고, 사람들은 이미 농담을 던지고 북적대고 먹고 마시면서 즐기고 있었다. 손님이 생길 때마다 손으로 치즈 덩어리를 찢어내는 치즈 행상이 보였다. 주름진 사과 한 자루를 든 여자가 있었다. 와인 부대는 이미 손에서 손으로 오가는 중이었고, 여자애 몇몇은 입맞춤을 팔았으며, 한 선원은 바다 파이프를 연주중이었다. 슬픈 눈을 가진 '깃펜'이라는 조그만 남자는 뒤편에 서서 자기 연극에 써먹게 뭐 훔쳐낼 만한 게 없나 보러 온 참이었다. 요술쟁이 코소모도 왔는데, 품에 행복한 항구의 외눈박이 창녀 이나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머시는 그 두 사람을 알 수 없었고, 그들도 머시를 알 수 없었다. 다에나는 군중 속에서 단골들을 알아보고 머시에게 그 사람들을 짚어주었다. 파리한 흰 얼굴에 얼룩덜룩한 보라색 손을 가진 염색공 델로노, 기름때 낀 가죽 앞치마를 입은 소시지 만드는 갈레오, 어깨에 애완 쥐를 얹은 키 큰 토마로. "토마로는 갈레오가 저 쥐를 못 보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에나가 경고했다. "내가 듣기로 갈레오가 소세지에 넣는 고기라곤 쥐밖에 없대." 머시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발코니도 가득 찼다. 1층과 3층은 상인과 선장, 그리고 다른 존경받을 만한 시민들을 위한 자리였다. 평범한 브라보스인들은 좌석값이 가장 싼 4층과 꼭대기 층을 선호했다. 위로는 밝은 색이 진동했고, 아래로는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흔들렸다. 2층 발코니는 개인 박스석으로 구획이 나뉘어서, 거기 앉는 권세가는 위아래로 가득한 저속함에서 벗어나 사생활과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2층의 시야가 제일 좋았고, 하인들은 음식, 와인, 쿠션 뭐든 손님들이 원하는 걸 가져다 바쳤다. '대문'의 2층 발코니석이 절반 넘게 차는 일은 드물었다. 연극을 그렇게 제대로 즐기고픈 권세가는 '대문'보다 섬세하고 시적인 공연을 올리는 '돔'이나 '푸른 등불'에 갈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도 오늘 밤은 달랐다, 웨스테로스에서 온 사절 덕택에. 한 박스석에는 오다리스 가문원 셋이 각각 유명한 코르티잔을 끼고 앉았다. 너무나 늙어서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긴 했을까 의문이 들게 하는 프레스테인은 혼자 앉았다. 토론과 프라넬리스는 불편한 동맹을 맺었듯 박스석도 불편하게 공유했다. '세 번째 검'은 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사무관을 다섯 봤어." 다에나가 말했다.

 

"베사로는 뚱뚱하니까 두 번 세야 해." 머시가 깔깔대며 대답했다. 이젬바로의 배가 불룩하긴 했지만, 베사로와 비교하자면 버드나무처럼 낭창낭창한 몸이었다. 그 사무관은 너무 거대한 나머지 일반 의자의 세 배나 되는 특별한 좌석이 필요했다.

 

"레이안 가문 사람들은 다 뚱뚱해." 다에나가 말했다. "자기네 선박만큼이나 배가 크지. 저 사람 아버지를 봤어야 하는데. 저 인간도 작게 보일 덩치였다고. 한번은 진실의 전당에서 투표하라고 소환받았는데, 바지선에 발을 딛으니까 배가 가라앉았어." 다에나가 머시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봐, 바다군주의 좌석이다." 바다군주는 한 번도 '대문'을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어쨌든 이젬바로는 극장을 통틀어 가장 크고 호화로운 박스석을 바다군주의 지정석으로 남겨두었다. "저 사람이 웨스테로스 사절일 거야. 저렇게 나이 든 사람이 저런 옷 입은 거 본 적 있어? 그리고 봐, 흑진주를 데려왔어!"

 

사절은 웃기게 생긴 회색 가닥들을 턱수염이랍시고 기른 여위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남자였다. 망토와 바지는 노랑색 벨벳이었다. 더블릿은 어찌나 밝은 파랑색인지 머시의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가슴팍에는 노란 실로 방패가 수놓여 있었고, 방패에는 청금석에서 뽑아낸 푸른색으로 물들인 위풍당당한 청색 수탉이 있었다. 위병 중 하나가 그가 좌석에 앉는 걸 도왔고, 다른 두 명은 박스석 뒤편에 섰다.

 

사절과 함께 온 여자는 남자 나이의 3분의 1도 안 되어 보였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녀가 지나갈 때면 등불도 더 밝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흑진주는 가슴이 깊게 파인 가운을 차려입었는데, 연노랑색 실크로 지은 옷이라 그녀의 밝은 갈색 피부와 놀랍도록 대조됐다. 검은색 머리는 금사 망으로 묶었고, 흑요석과 금이 박힌 목걸이는 풍만한 가슴 위로 살짝 스쳤다. 그들이 지켜보던 와중 그녀가 사절 가까이 몸을 숙이더니 귓가에 뭐라고 속삭여 사절이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갈색 진주라고 불러야 해." 머시가 다에나에게 말했다. "검다기보단 갈색인 걸."

 

"첫 번째 흑진주는 잉크처럼 까맸어. 바다군주의 아들과 여름 제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해적 여왕이었지. 웨스테로스의 드래곤 왕(*아에곤 4세)이 자기 정부로 들였고."

 

"드래곤을 보고 싶다." 머시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왜 저 사절은 가슴에 닭을 달고 있는 거야?"

 

다에나가 아우성을 쳤다. "머시, 그것도 몰라? 문장(*다에나는 sigil이 아니라 siggle이라고 말하고 있다)이잖아. 해넘이 왕국에선 모든 영주들이 자기 문장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꽃, 어떤 사람들은 물고기, 어떤 사람들은 곰 아님 엘크, 다른 것들도 많고. 보이지, 사절의 위병들은 사자를 달고 있잖아."

 

사실이었다. 위병은 네 명이었다. 다들 덩치가 컸고, 고리 갑옷과 웨스테로스의 묵직한 장검으로 무장한 거칠게 생긴 남자들이었다. 금색으로 가장자리를 댄 진홍색 망토는 눈으로 붉은 석류석이 박힌 황금 사자로 여몄다. 머시가 금박을 입힌 사자 모양 투구 밑의 얼굴들을 슬쩍했을 때, 그녀의 배가 전율했다. 신들께서 내게 선물을 주셨어. 그녀의 손가락이 다에나의 팔 깊숙이 파고들었다. "저 위병, 흑진주 뒤 끝에 선 사람."

 

"저 사람이 왜? 아는 사람이야?"

 

"아니." 머시는 브라보스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웨스테로스인을 알겠는가? 잠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냥... 그러니까, 잘생겨서, 안 그래?" 정말로 거칠게나마 잘생기긴 했다, 눈은 엄혹했지만.

 

다에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엄청 늙었는걸. 다른 사람들만큼 늙진 않았지만... 서른은 되겠다. 그리고 웨스테로스인이잖아. 끔찍한 야만인이라고, 머시. 저런 작자들하곤 거리 두는 게 좋을 걸."

 

"거리를 두라고?" 머시가 깔깔댔다. 그녀는 잘 웃는 여자애, 머시였다. "아니, 더 가까이 가야겠어." 그녀는 다에나의 손을 꽉 쥐고서 말했다. "만약 딱딱이가 찾으면 내가 대사 연습하러 갔다고 말해줘." 머시의 대사는 몇 줄 없었고, 그마저도 거의 다 "아, 안 돼요, 안 돼, 안 돼." 나 "하지 마요, 아 안 돼, 손대지 마." 혹은 "제발요, 나리, 전 아직 처녀랍니다." 따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젬바로가 뭐든 대사 있는 역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불쌍한 머시가 대사를 숙지하려고 연습할 거란 건 뻔했다.

 

칠왕국에서 온 사절은 자신과 흑진주 뒤에 위병 둘을 배치하고 다른 둘은 방해받지 않으려고 문 밖에 세웠다. 머시가 어두운 복도에서 소리 없이 그들을 향해 미끄러져 갔을 때 바깥에 선 위병 둘은 웨스테로스의 공용어로 조용히 얘기중이었다. 그건 머시가 아는 언어가 아니었다.

 

"일곱 지옥아, 왜 이리 축축해." 위병이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뼛속까지 한기가 들었다고. 망할 오렌지 나무는 어딨는 거야? 자유도시에는 오렌지 나무가 있다고 들었는데. 레몬, 라임, 석류, 고추도 있고. 밤이 따뜻하고 여자애들은 배를 까고 다닌다고. 배를 내놓고 다니는 여자애들은 어디 있는 건데?"

 

"저 아래 리스, 미르, 옛 볼란티스에 있겠지." 다른 위병이 대답했다. 이쪽은 더 나이가 들어서, 배가 나오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였다. "타이윈 공이 아에리스의 수관이었을 때 리스에 가본 적 있었지. 브라보스는 킹스랜딩보다 북쪽에 있다, 멍청아. 염병할 지도 볼 줄 모르냐?"

 

"거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네 기대보다 오래." 나이든 쪽이 답했다. "저 자식이 금 없이 돌아가면 대비가 머리를 잘라버릴 거다. 그리고, 저놈 마누라를 본 적 있는데 하도 살이 쪄서 캐스털리 락 계단을 무서워서 못 내려갈 정도였다고. 지금 검댕 여왕을 끼고 있는데, 누가 그런 인간들이 기다리는 데로 돌아가려 하겠어?"

 

잘생긴 위병이 씩 웃었다. "우리랑 저 계집을 나누지 않을까, 일 다 보고 나면?"

 

"뭐, 미쳤냐? 우리 같은 인간들을 신경이나 쓸 것 같아? 그 병신은 우리 이름도 제대로 모른다고. 클리게인은 달랐나 보지."

 

"경은 연극이나 비싼 창녀들한테 신경쓰는 분이 아녔지. 경이 계집을 원할 때면 그냥 가졌지만, 가끔은 그 뒤에 우리가 품을 수 있게 해줬어. 한번 쓴 뒤라도 좋으니 흑진주 맛을 보고 싶은데. 가랑이 사이는 분홍색일까?"

 

머시는 대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피투성이 수관>이 막 시작하려 했고, 딱딱이가 의상 손질을 도우라고 그녀를 찾고 있을 거였다. 이젬바로가 배우들의 왕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건 딱딱이었다. 잘생긴 위병과 보낼 시간은 미룰 수 있었다.

 

<피투성이 수관>은 묘지에서 막을 올렸다.

 

나무 묘비 뒤에서 갑자기 난쟁이가 나타나자 관객들이 우우 하며 욕을 퍼부었다. 보보노는 뒤뚱거리며 무대 앞으로 걸어가 관객들을 곁눈질했다. "칠면의 신이 나를 속였도다." 그가 대사를 외치기 시작했다. "순금으로 빚어진 내 고귀하신 부친, 금으로 내 형제자매를, 소년과 소녀를 만들었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음험한 것으로 만들어졌으니, 뼈와 피, 진흙이 뭉쳐..."

 

그때 길다란 검정 로브를 입은 마로가 이방인 신의 수척하고 끔찍한 몰골을 하고서 보보노 뒤에서 나타났다. 마로의 얼굴도 검은색이었고, 이빨은 피로 붉고 번들거렸으며, 상아색 뿔은 이마에서 위로 솟아올랐다. 보보노는 그를 볼 수 없었지만 발코니에선 보였고, 이젠 일반 관객석에서도 보였다. '대문'이 점점 조용해졌다. 마로는 말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머시도 마찬가지였다. 의상은 모두 걸어두었고, 딱딱이는 다에나가 궁정에 서는 장면에서 입을 가운을 꿰매느라 바빴기 때문에 머시가 없어도 티 날 염려가 없었다. 머시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편으로 돌아가 위병들이 사절의 박스석 바깥에 서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어두운 벽감 안에 돌처럼 가만히 서 있자니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확신을 얻기 위해 그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내가 너무 어린가? 너무 평범한 얼굴인가? 너무 말랐나? 가슴이 큰 여자애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길 바랐다. 그녀의 가슴으로 얘기하자면 보보노가 옳았으니까. 단둘이 있게 내가 원하는 곳으로 끌어낼 수 있다면 최고일 텐데. 하지만 날 따라올까?

 

"그놈일 수도 있을까?" 매력적인 쪽이 말했다.

 

"뭔 소리야, 다른자들이 정신을 빼 간 거냐?"

 

"안 될 거 있나? 난쟁이 아뇨?"

 

"세상에 난쟁이가 꼬마 악마 하나냐."

 

"아닐 지도 모르지, 하지만 보쇼, 다들 꼬마 악마가 얼마나 영리한지 입을 모아 얘기하잖아. 어쩌면 제 누이 눈을 피할 가장 좋은 곳으로 자기 자신을 웃기는 연극단을 골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누나 코를 비틀어주려고."

 

"아, 정신이 나갔구만."

 

"흠, 어쩌면 연극이 끝나면 따라가서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 위병이 검대 위로 손을 올렸다. "만약 내가 맞다면, 영주가 되겠지. 만약 틀렸다면, 피 좀 보지 뭐, 난쟁이일 뿐이니까." 그가 크게 웃었다.

 

무대 위에선 보보노가 마로의 사악한 이방인과 흥정 중이었다. 보보노는 작은데도 목소리가 컸고, 지금 그의 목소리는 가장 높은 서까래까지 울렸다. "나에게 잔을 주시오." 그가 이방인에게 말했다. "깊게 들이켤 잔을 주시오. 금과 사자 피 맛이 난다면 더욱 좋으니. 난 영웅이 될 수 없는 몸, 날 괴물로 만들어 그들에게 사랑 대신 두려움으로 교훈을 주리라."

 

머시는 보보노의 마지막 대사를 입모양으로 함께 읊었다. 그녀의 것보다 더 나은 대사였고, 시의적절하기도 했다. 날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야, 그러니 연극을 시작해. 그녀는 다면신에게 소리 없이 기도를 올리고, 벽감에서 빠져나와 위병들 앞에 튀어나갔다. 머시, 머시, 머시. "영주님들, 브라보스어 하세요? 아,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두 위병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또 뭐야?" 나이 든 쪽이 물었다. "얜 누구지?"

 

"배우 중 하나요." 매력적인 쪽이 말했다. 그가 색이 밝은 머리카락을 이마 너머로 쓸어넘기고선 미소를 지었다. "미안, 예쁜아. 네가 뭐라 떠드는진 못 알아듣겠다."

 

가식, 머시는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공용어밖에 몰라. 좋지 않았다. 포기하거나 밀어붙여. 포기할 순 없었다. 그 정도로 이 사람을 원했다. "전 공용어를 해요, 조금이지만요." 그녀는 머시의 가장 달콤한 미소를 내보이며 거짓말을 했다. "웨스테로스의 영주님들이시죠, 친구가 그랬어요."

 

나이든 쪽이 웃었다. "영주? 그래, 그렇다."

 

머시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젬바로가 영주님들을 기쁘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지… "

 

두 위병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잘생긴 쪽이 손을 뻗어 가슴을 만졌다. "뭐든지?"

 

"역겹구만." 나이든 쪽이 말했다.

 

"왜? 이젬바로가 환대를 해주겠다는데, 거절하면 무례 아뇨." 아까 의상을 손봐줄 때 난쟁이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가 옷감 위로 그녀의 젖꼭지를 비틀었다. "배우가 창녀 다음으로 좋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얘는 아직 어린애야."

 

"아니에요," 머시는 거짓말을 했다. "전 이제 처녀랍니다."

 

"오래가진 못할 거다." 반반한 쪽이 말했다. "나는 라포드 공이다, 예쁜아. 그리고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알지. 이제 치마 올리고 저 벽에 기대."

 

"여기선 말고요." 머시가 그의 손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연극이 들리는 곳에선 안 돼요, 혹시 소리를 냈다간 이젬바로가 엄청 화를 낼 거에요."

 

"그럼 어디서?"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나이 든 위병이 인상을 썼다. "뭐, 이대로 내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혹시 널 찾으면 어쩔 건데?"

 

"뭐하러 그러겠소? 볼 연극도 있겠다, 거기에 창녀도 끼고 있는데. 내가 창녀를 품으면 안 될 이유가 뭐지? 얼마 안 걸릴 거요."

 

그래, 그녀는 생각했다. 얼마 안 걸릴 거야. 머시는 그의 손을 잡고 뒤편으로 돌아 계단을 내려가서 안개 낀 밤으로 이끌었다. "원한다면 배우가 될 수도 있어요." 그가 그녀를 극장 벽에 밀어붙이자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내가?" 위병은 코웃음쳤다. "난 아냐. 그 염병할 대사들 하며, 절반도 기억 못 할 거다."

 

"처음엔 어렵죠." 머시는 인정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쉬워져요. 대사를 말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어요, 가르쳐 줄게요."

 

그가 머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가르치는 건 내가 하지. 첫 번째 수업을 받을 시간이야." 그는 머시를 몸에 바싹 끌어당기고서 입술을 맞추고 그녀의 입 안에 자기 혀를 밀어넣었다. 혀는 장어처럼 온통 축축하고 미끌거렸다. 머시는 그의 혀를 자기 것으로 핥고서 숨이 가쁜 채 입을 뗐다. "여기선 말고요. 누가 볼지도 몰라요. 제 방이 가까이에 있긴 한데, 서둘러야 해요. 2막 전까진 돌아가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강간당하는 걸 놓쳐요."

 

그가 씩 웃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도 머시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손에 손을 잡고서, 그들은 안개 사이로 다리와 골목과 갈라진 계단 다섯 층을 달렸다. 머시의 작은 방 안에 들이닥쳤을 때 위병은 헐떡이고 있었다. 머시는 수지 양초를 켜고서 깔깔대며 춤을 추며 그를 돌았다. "아, 지치셨군요. 제가 나리 나이를 까먹었어요. 잠깐 주무실래요? 누워서 눈 감고 계심 꼬마 악마가 절 강간한 뒤에 돌아올게요."

 

"넌 아무 데도 안 가." 그가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누더기 벗어, 그러면 내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보여주지."

 

"머시," 그녀가 말했다. "내 이름은 머시에요. 말할 수 있나요?"

 

"머시."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라프다."

 

"알아요."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다대자 모직 바지 아래로 그가 얼마나 발기했는지가 느껴졌다.

 

"착하지, 끈 풀어." 그가 재촉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는 그의 허벅지 안쪽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젠장, 조심하라고, 지금-"

 

머시는 헉 하더니 당황하고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피가 나요."

 

"무슨-"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신들이시여. 무슨 짓을 한 거야, 쥐방울만한 개년아?" 그의 허벅지 위로 붉은색 얼룩이 퍼져나가며 무거운 직물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것도요." 머시가 끽끽댔다. "전 절대... 아, 아, 피가 너무 많이 나요. 그만, 그만 해요, 무서워."

 

그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으로 허벅지를 누르자 손가락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와 다리를 타고 장화로 흘러들어갔다. 지금은 별로 잘생겨 보이지 않네. 그녀는 생각했다. 그냥 새하얗게 겁에 질렸을 뿐이야.

 

"수건," 위병이 헐떡였다. "수건을 가져와, 아님 걸레나, 그걸 대고 눌러. 빌어먹을. 어지러운데." 그의 다리는 허벅지에서 흐른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가 다리에 체중을 실어보려고 하자 무릎이 꺾이더니 고꾸라지고 말았다. "도와줘." 사타구니 부근까지 붉어지자 그가 애원했다. "어머니께서 자비를 베푸시길. 의사... 가서 의사를 찾아와, 빨리."

 

"의사는 다음 수로에 있는데, 안 올 거에요. 직접 가야 해요. 걸을 수 없어요?"

 

"걸어?" 그의 손가락은 피로 번들거렸다. "눈깔이 멀었냐? 멱 따인 돼지처럼 피가 나는구만. 이 꼴로 걸을 순 없다고."

 

"그럼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날 업고 가야지."

 

봤지? 머시는 생각했다. 넌 대사를 알아,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 아리아가 다정하게 물었다.

 

친절한 라프는 그녀의 소매에서 길고 얇은 칼날이 빠져나오는 것을 똑똑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칼을 라프의 턱 밑에 밀어넣고 비틀고서 한 번 매끄럽게 그어서 반대편에서 뽑아냈다. 가는 붉은색 비가 뒤따랐고, 눈에선 불이 꺼졌다.

 

"발라 모굴리스." 아리아는 속삭였지만 라프는 죽어서 듣지 못했다.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죽이기 전에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걸 도왔어야 했어. 이젠 수로 아래로 끌고 내려가서 굴려넣어야겠지. 나머지는 장어들 몫이었다.

 

"머시, 머시, 머시." 그녀는 슬프게 노래했다. 머시는 멍청하고 경박한 여자애였지만 심성은 착했다. 머시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다에나와 딱딱이 그리고 나머지, 심지어는 이젬바로와 보보노까지도 그리울 것이다. 이 일로 바다군주와 가슴에 닭을 단 사절에게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었다. 뛰어야겠지. 머시에겐 아직 말해야 할 대사가 첫 마디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남아 있었고, 만일 머시가 강간당하는 데 늦는다면 이젬바로는 그녀의 예쁘고 작은 텅 빈 머리통을 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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