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리온 1은 마틴이 공개했지만 사본이 존재하지 않음.
저 멀리 어딘가에서 죽어가는 남자가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말에 올라라!" 둘째 아들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북쪽에 위치한 숙영지에서, 한 남자가 기스카어로 고함을 질렀다. "말에 올라라! 말에 올라!" 높고 새된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가르고 숙영지 너머 멀리까지 퍼졌다. 티리온의 기스카어 실력은 딱 그 정도 말을 알아들을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 서린 두려움은 어떤 언어로든 분명했다. 어떤 심정일지 알아.
말을 찾을 때가 되었다. 죽은 소년의 갑옷을 입고 장검과 단검을 매고 패인 자국 있는 대투구를 쓸 때가 되었다. 새벽이 지나자 도시의 성벽과 탑 너머로 태양이 떠올라 눈이 멀 만큼 밝은 햇살이 비쳤다. 서쪽으로는 별들이 하나씩 흐려졌다. 스카하자단을 따라 트럼펫이 불렸고 미린의 성벽에서는 전투 나팔로 화답했다. 강어귀에서는 불타는 배가 가라앉았다. 하늘에서는 죽은 자와 드래곤들이 나는 동안, 노예상만에서는 군함이 맞부딪혀 충돌했다. 티리온이 있는 자리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소리는 들렸다. 선체와 선체가 부딪히면서 박살 나는 소리, 강철인의 굵은 전투 나팔과 콰스의 이상하게 높은 호각 소리, 노가 쪼개지는 소리, 외침과 전투 함성, 갑옷에 도끼가, 방패에 검이 내리쳐지는 소리- 모두 다친 남자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섞여들었다. 대부분의 배는 아직 만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기에 거기서 나는 소리는 멀리서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지만, 그래도 티리온은 알았다. 살육의 음악이다.
그가 선 자리로부터 270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악한 자매가 솟았다. 시체를 움켜쥔 그녀의 기다란 팔이 위로 덜커덩 움직이더니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벌거벗고 부푼 창백한 죽은 새들이 사지가 축 늘어진 채 공중을 가르며 떨어졌다. 공성 진영은 천박한 장밋빛과 금빛에 뒤덮여 일렁였지만 미린의 그 유명한 계단식 피라미드는 밝은 빛과 대조되는 암흑으로 우뚝했다. 한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티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드래곤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독수리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주 거대한 독수리겠지만.
둘째 아들들의 퀴퀴한 천막에서 며칠이나 숨어 지냈더니 바깥 공기가 신선하고 맑게 느껴졌다. 티리온이 있는 자리에서 만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싸한 소금 냄새가 바다가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티리온은 그 공기로 폐를 채웠다. 전투하기 좋은 날이군. 동쪽에서 북 치는 소리가 메마른 평원을 가로질러 들려왔다. 기마병 한 무리가 바람결단의 푸른 깃발을 휘날리며 마귀할멈 곁을 쏜살같이 달렸다.
더 어린 남자였더라면 모든 걸 즐겁게 느꼈을지도 몰랐다. 더 멍청한 남자였더라면 젖꼭지에 고리를 단 더럽게 못생긴 융카이 노예 병사가 자기 눈 사이에 도끼를 꽂아 넣기 전까지는 이 모든 걸 장엄하고 영광스럽다 여겼을지도 몰랐다. 티리온 라니스터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신들은 나를 검을 휘두를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으면서 왜 자꾸 날 전투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단 말이야?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첫 번째 전투로 생각이 미쳤다. 타이윈 공의 나팔 소리에 깬 샤에가 처음으로 동요한 사람이었다. 밤사이 그를 즐겁게 해줬던 달콤한 나팔이 겁먹은 아이가 되어 벌거벗은 채 품 안에서 떨었더랬다. 아니면 그것도 전부 내가 날 용감하고 멋지다고 느끼도록 하려고 꾸며낸 술수였을까? 참 대단한 배우가 됐을 텐데. 갑옷 입는 걸 도우라고 포드릭 페인을 소리쳐 불렀었지만, 그 소년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최고로 잽싼 녀석은 아니었지만, 결국엔 괜찮은 종자였지. 나보다 나은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좋겠군.
이상하게도 블랙워터보다 그린포크가 훨씬 생생하게 기억났다. 내 첫경험이었으니까. 첫 번째는 절대 잊지 못해. 티리온은 갈대 사이로 창백한 손가락처럼 강 위를 흘러가던 안개를 기억했다. 자줏빛 하늘 위로 흩뿌려진 별들과 아침 이슬로 반짝이는 들판, 동쪽에서 화려한 붉은빛으로 떠오르던 아름다운 해돋이도 뚜렷이 기억했다. 포드와 함께 티리온이 짝짝이 갑옷을 입는 것을 돕던 샤에의 손길도 기억했다. 그 염병할 투구. 못이 박힌 양동이 같았지. 그래도 그 못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첫 번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도왔지만, 그로트와 페니마저도 그날의 그보다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았으리라. 샤에는 강철을 두른 티리온더러 '무시무시하다'고 했더랬다. 어쩜 그렇게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멍청할 수가 있었을까? 자지로 생각하는 것보단 정신머리가 있었어야지.
둘째 아들들은 안장을 얹는 중이었다. 서두르는 일 없이 침착하고 정확한 손길이었다. 그들이 전에 백 번은 해봤을 별것 아닌 일이었다. 몇몇은 손에 손으로 와인 아니면 물이 들었을 가죽 물통을 돌렸다. 보코코는 거리낌 없이 자기 연인과 입을 맞추며 거대한 한쪽 손으로는 그 소년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다른 쪽 손은 머리카락 속에 파묻었다. 그 뒤에선 가리발드 경이 자신의 덩치 큰 거세마의 갈기를 빗질해주고 있었다. 켐은 바위에 앉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죽은 형제를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킹스랜딩에 서 살았을 때 알았다던 친구라던가. 망치와 쇠못은 사람들 사이를 옮겨다니며 갑옷을 조정하고 창과 장검을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날을 갈았다. 날치기는 초엽을 씹으면서 갈고리 손으로 불알을 긁으며 농담을 던졌다. 어째서인지 날치기를 보면 브론이 생각났다. 이젠 블랙워터의 브론 경이겠지. 세르세이가 죽이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을걸. 문득 둘째 아들들이 지금껏 겪은 전투는 몇이나 될지가 궁금해졌다. 소규모 교전은 몇 번이고, 습격은 몇 번이나 해 봤을까? 휩쓸고 지나간 도시는 몇이며, 썩게 내버려 두거나 묻어야 했을 형제는 또 몇이었을까? 이들과 비교하자면 티리온은 아직 풋내기 소년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티리온이 용병단원 절반보다 더 나이 들긴 했지만.
이번이 그의 세 번째 전투가 되리라. 피로 물들어 노련한, 인장이 찍혀 봉해진 증명된 전사, 그게 나야.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입히고, 나 자신도 다하고서 내가 칼을 휘두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려고 살아남았지. 선봉에도 섰고, 병사들이 내 이름을 외치는 것도 듣고, 나보다 더 크고 더 나은 남자들을 쓰러뜨렸어. 영광이란 것도 조금 맛보았지... 그게 영웅들을 위한 풍성한 와인 아니던가? 또 한 모금을 마다할 이유가 뭔데? 하지만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또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피를 차갑게 식혔다. 그는 내내 자신에게 살든 죽든 상관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가마, 장대배, 돼지, 노예선과 무역 갤리선, 창녀와 말을 타고 세상의 절반을 건넜지만... 결국 자신이 꽤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었다.
이방인이 창백한 암말을 타고 손에 칼을 쥔 채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지만, 티리온 라니스터는 그를 다시 만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꼬마 악마, 넌 정말 사기꾼이야. 위병 백 명이 네 아내를 강간하게 두고, 입씨름하다 아버지의 배를 쏴버리고, 연인의 목에 황금 사슬을 감아서 얼굴이 시커메질 때까지 비틀었지만 그래도 넌 네가 계속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티리온이 막사로 돌아갔을 때 페니는 이미 갑옷을 입은 상태였다. 페니는 연극 일을 하느라 몇 년 동안이나 자기 몸에 나무 갑옷을 둘렀었다. 걸쇠와 버클을 죄는 법만 안다면 진짜 판금과 쇠사슬 갑옷도 별다를 게 없는 법이었다. 만일 이곳저곳 찌그러지고 녹슬고 긁히고 얼룩지고 색이 벗겨졌다 한들 상관없었다, 검을 막는 데엔 여전히 유용할 테니까.
유일하게 페니가 걸치지 않은 무장은 투구였다. 티리온이 들어서자 그녀가 시선을 들었다. "갑옷을 안 입었네요. 무슨 일이에요?"
"평소 같은 일들이지. 진흙과 피, 영웅적인 행위들, 죽임과 죽음. 저기 만이랑 도시 성벽 아래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융카이군이 어디로 돌아서던 뒤에 적을 두게 되는 거야. 가까운 쪽 상황은 아직 괜찮지만, 곧 우리도 투입될 걸." 어느 쪽이든지 간에. 티리온은 둘째 아들들이 또 주인을 갈아치울 때가 되었다고 거의 확신했다... 확실한 것과 거의 확실한 것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했다면, 우린 모두 진 거야. "투구 쓰고 다 튼튼하게 조여졌는지 확인해봐. 한번은 빠져 죽지 않으려고 투구를 벗었는데, 그 대가를 코로 치렀지." 티리온은 자기 흉터를 가리켰다.
"먼저 당신이 갑옷을 입어야죠."
"원한다면. 조끼를 먼저 입고. 삶은 가죽에 철 단추를 단 거로. 그 위엔 고리 갑옷을 걸치고 목 가리개를 해야지." 그는 막사 안을 둘러보았다. "와인이 있나?"
"아뇨."
"어제 저녁 먹은 뒤 반 병이 남았었잖아."
"반의 반 병이고, 그것도 마셔버렸잖아요."
티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와인 한 잔에 누나를 팔겠다."
"당신은 말 오줌 한 잔이어도 누이를 팔 거잖아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지라 티리온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 오줌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잘 알려져 있었던가, 아니면 내 누이를 만나본 적이 있는 건가?"
"소년 왕을 위해 시합을 했을 때 딱 한 번 봤을 뿐이에요. 오빠는 왕비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죠."
그로트는 멍청한 이름의 발육부진 아첨꾼이야. "전투에 맨정신으로 나가는 사람은 바보밖에 없지. 플럼은 와인을 마실걸. 플럼이 싸우다 죽으면 어떡하지? 와인을 낭비하는 건 죄악인데."
"말하지 말아요. 조끼 끈을 매야 하니까."
티리온은 노력했지만, 살육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고 혀는 가만히 있으려 하질 않았다. "푸딩 얼굴은 용병을 써서 강철인을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고 싶을 거야." 티리온은 옷을 입혀주고 있는 페니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인간은 내시들이 성문에서 3미터 넘게 나오기 전에 자기 기병 전부를 내시들한테 돌격시켰어야 했어. 고양이는 왼쪽으로, 우리랑 바람결단은 오른쪽으로 보내서 측면 양 끝을 찢어버렸어야지. 일 대 일이면 거세병도 다른 창병과 다를 바 없어. 거세병의 규율이 무서운 거지, 대열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면..."
"팔 들어요." 페니가 말했다. "그래요, 더 편하죠. 어쩌면 당신이 융카이군을 지휘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병사도 노예인데, 노예 지휘관도 안 될 거 있겠어? 그래도 그러면 시합을 망치는 거지. 이건 현명한 주인들의 시바스 게임에 불과해. 우리는 장기말이고." 티리온은 생각에 잠겨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 노예상들, 내 아버지랑 그 면에서 공통점이 있군."
"당신 아버지요? 무슨 뜻이죠?"
"그냥 내 첫 번째 전투를 생각 중이었어. 그린포크. 강하고 길을 사이에 두고 싸웠었지. 아버지의 전열 배치를 보고서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했던 게 기억나. 태양을 향해 꽃잎을 펼친 꽃, 강철 가시를 두른 진홍색 장미 같았지. 그리고 아버지는, 아, 그만큼 눈부시게 빛난 적이 없었어. 진홍빛 갑옷에 금실로 만든 무거운 망토를 둘렀었지. 어깨엔 황금 사자 한 쌍이 앉았고, 투구에도 한 마리가 있었지. 아버지의 종마는 정말 훌륭했어. 타이윈 공은 그 말 위에 앉아서 모든 전투를 지켜보았고, 90미터 안으로 어떤 적도 들어오지 못했어. 타이윈 공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고, 미소짓지도 않았고, 땀을 흘리지도 않았어, 수천 명이 자기 발밑에서 죽어가는데 말이야. 내가 의자에 앉아서 시바스 게임판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해봐. 우린 거의 쌍둥이처럼 보일 거야... 나한테 말이랑 진홍빛 갑옷, 금란 망토가 있어야 말이지만. 또 타이윈 공이 나보다 키가 크긴 하지. 머리카락은 내가 더 많고 말이야."
페니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페니는 새처럼 재빠르게 달려들어 자기 입술을 티리온에게 눌렀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이건 뭐지? 거의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티리온은 이미 알았다. 고마워, 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다시 입 맞춰도 좋단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얘야, 널 해치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페니는 아이가 아니었고 그가 그렇게 바란다 한들 정말 그리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상 처음으로 티리온 라니스터는 말문을 잃었다.
너무나 어리게 생겼어. 티리온은 생각했다. 페니는 소녀에 불과해. 난쟁이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거의 예쁘장해 보일 소녀. 숱 많고 곱슬곱슬한 페니의 머리카락은 따뜻한 갈색이었고, 두 눈은 크고 순진했다. 너무 순진해.
"저 소리 들려?" 티리온이 말했다.
페니가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죠?" 티리온의 자라지 못한 다리에 짝짝이 정강이받이를 채우며 그녀가 물었다.
"전쟁. 여기서 5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 양쪽에서 벌어지고 있지. 전쟁은 살육이야, 페니. 남자들이 내장을 늘어뜨린 채 진흙탕을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고, 잘린 팔다리에 부러진 뼈와 피로 된 웅덩이가 전쟁이야. 비가 많이 온 뒤면 벌레들이 땅에서 나오는 거 알지? 땅이 피로 푹 젖을 만큼 큰 전투 뒤면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군. 전쟁이란 이방인이 온다는 뜻이야, 페니. 검은 염소, 창백한 아이, 다면의 그분, 원하는 대로 불러. 그건 죽음이야."
"무서워요."
"그런가? 잘됐군. 무서워해야지. 해안에는 강철인이 들끓고 바리스탄 경과 거세병이 도시 성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중인데, 그사이에 낀 우리는 잘못된 편에서 싸우고 있어. 나도 죽도록 무서워."
"그렇게 말하지만 계속 농담하고 있잖아요."
"농담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한 가지 방법이지. 와인은 또 다른 방법이고."
"용감하네요. 작은 사람도 용감할 수 있죠."
나의 라니스터 거인, 티리온은 들었다. 날 조롱하고 있어. 또 페니의 뺨을 때릴 뻔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화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페니가 말했다. "용서해 줘요. 그냥 겁먹은 것 뿐이에요." 그녀가 티리온의 손을 만졌다.
티리온은 페니의 손길을 뿌리쳤다. "무서워요." 샤에가 하던 말과 똑같았다.샤에의 눈은 달걀만큼 컸고, 난 그걸 모조리 삼켰지. 난 샤에가 뭔지 알았어. 브론한테 여자를 하나 데려오라 했더니 샤에를 가져다줬지. 티리온의 손이 주먹으로 말리고, 활짝 웃는 샤에의 얼굴이 눈앞에서 떠다녔다. 그러더니 쇠사슬이 샤에의 목에 감겼다. 샤에의 손이 티리온의 얼굴 앞에서 나비만한 힘으로 버둥대는 동안 황금으로 된 손은 샤에의 살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만약 티리온에게 쇠사슬이 있었더라면... 석궁이나 단검, 뭐라도 있었다면 그는... 어쩌면... 그가...
그제야 티리온은 고함 소리를 들었다. 기억의 바다에 잠겨 시커먼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지만, 고함 소리가 순식간에 세상을 다시 불러왔다. 티리온은 손을 펴고, 숨을 들이쉬고 페니에게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 생겼어." 그는 그게 뭔지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드래곤이다.
녹색 짐승은 부서지고 불타는 장선과 갤리선을 아래에 두고서 만 위를 비스듬히 날며 빙빙 돌고 있었지만, 용병들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쪽은 흰색이었다. 270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악한 자매가 팔을 휘두르자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신선한 시체 여섯 구가 공중에서 춤을 추었다. 위로, 위로, 또 위로. 그러더니 두 구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타는 시체가 막 떨어지려는 순간, 드래곤이 이빨 사이로 창백한 불꽃을 흘리면서 턱으로 시체를 으드득 씹었다. 흰 날개 한 쌍이 아침 공기를 가르자 짐승이 다시 공중으로 솟았다. 두 번째 시체는 너무 멀리 뻗은 발톱에 맞고 튕기더니 곧장 떨어져서 융카이 기병들 가운데로 추락했다. 그들 중 몇몇도 불에 붙었다. 말 한 마리는 앞발을 들고 일어나 기수를 던져버렸고, 나머지는 불길에서 벗어나 몸을 식히려고 도망쳤다. 티리온 라니스터는 야영지에 번지는 공포를 거의 맛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톡 쏘는 익숙한 소변 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난쟁이는 주위를 둘러보고서 오줌을 지린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잉크통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가서 바지 갈아입어야겠는데." 티리온이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러는 김에 편도 갈아타라고." 경리감은 얼굴이 핼쑥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전령이 말을 달려왔을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드래곤이 하늘에서 시체들을 낚아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망할 장교로군. 티리온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금 말을 타고 황금 갑옷을 입은 그 전령은 큰 소리로 자신이 융카이 최고사령관인 고귀한 세력가 고르자크 조 에라즈의 명으로 왔음을 알렸다. "고르자크 님께서 플럼 대장에게 찬사와 더불어 병사들을 만 해안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청하셨다. 우리 함대가 공격받고 있다."
너희 함대는 침몰하고 불타고 도망치는 중이겠지. 티리온은 생각했다. 배는 탈취당하고 선원들은 칼에 찔리고 있겠고. 그는 캐스털리 락의 라니스터였고, 멀지 않은 곳에 강철 군도가 위치했다. 강철인 약탈자들은 라니스터의 해안에서 낯설지 않았다. 강철인들은 수 세기에 걸쳐 라니스포트를 적어도 세 번 불태웠고 스물다섯 번 가까이 습격했다. 서부인이라면 다들 강철인이 얼마나 잔학한지 알았다. 이 노예주들은 이제 막 배우는 단계일 뿐이었다.
"대장은 지금 여기 안 계시오." 잉크통이 전령에게 말했다. "여장군을 보러 가셨소."
기수가 태양을 가리켰다. "말라자 아가씨의 명령은 해가 뜨면서 끝났다. 고르자크 님 명대로 해라."
"오징어 함대를 공격하라는 건가? 저기 물 위에 떠 있는 걸?" 경리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로선 어째야 할지 모르겠지만, 갈색 벤이 돌아오면 너희 고르자크가 뭘 원하는지 알리겠소."
"내 말은 명령이다. 지금 당장 수행해."
"우리는 우리 대장 명령만 따르오." 잉크통이 평소의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 안 계신다고 말했지 않소."
전령이 인내심을 잃는 게 보였다. "전투가 이미 시작됐는데. 너희 지휘관도 함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닌 걸 어쩌나. 그 여자애가 불러서 가셨다니까."
전령의 얼굴이 보랏빛이 되었다. "당장 명령대로 하지 못할까!"
날치기가 잘 짓이겨진 초엽 한 덩어리를 입 왼쪽으로 뱉어내더니 융카이 기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는 전부 나리님처럼 기병입니다. 잘 훈련된 군마라면 창으로 된 벽은 뛰어넘겠죠. 불구덩이를 뛰어넘을 놈들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물 위를 달릴 수 있는 말이 있다곤 못 들어봤습니다."
"배에서 병사를 내리고 있단 말이다!" 융카이 귀족이 악을 썼다. "스카하자단 입구를 화공선으로 틀어막았는데, 네놈이 여기서 나불거리는 동안 병사 백 명이 또 첨벙거리며 상륙 중이다. 병사들을 모아서 다시 바다로 밀어 넣어! 당장! 고르자크의 명령이다!"
"어느 쪽이 고르자크죠?" 켐이 물었다. "토끼인가?"
"푸딩 얼굴." 잉크통이 말했다. "토끼는 장선을 상대로 경기병을 보낼 멍청이가 아냐."
그쯤하면 기수도 충분히 들었다. "고르자크 조 에라즈 님께 네놈이 명령을 거부했다고 알리겠다." 그가 뻣뻣하게 말하더니 용병들의 왁자지껄한 폭소 가운데 금마를 돌려 왔던 길로 질주해 나갔다.
잉크통이 웃음기를 거둔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만." 그가 갑자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리로 돌아가. 안장을 얹어라. 대장이 제대로 된 명령을 들고 돌아왔을 때 다들 즉시 달려 나갈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리고 요리불은 꺼. 전투가 끝나도 살아있을 만큼 명줄이 질기다면 그때 먹어도 늦지 않겠지." 그의 시선이 티리온에게로 떨어졌다. "뭘 히죽거리고 있나? 그 갑옷을 입으니 꼬마 광대 같군, 반쪽이."
"광대가 되기보단 광대처럼 보이는 게 낫지." 난쟁이가 답했다. "우린 지는 편에 섰어."
"반쪽이 말이 맞다." 조라 모르몬트가 말했다. "대너리스가 돌아왔을 때 노예주들을 위해 싸우고 있고 싶지 않아... 그리고 대너리스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다. 지금 제대로 공격하면 여왕은 잊지 않을 걸세. 인질을 찾아서 풀어줘. 그렇게 하면 내 가문과 고향의 명예를 걸고 이게 처음부터 갈색 벤의 계획이었다고 맹세하지."
노예상만에선 또 다른 콰스 갤리선이 갑자기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동쪽에서는 코끼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섯 자매의 팔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시체를 던졌다. 미린의 성벽 아래에는 창으로 된 두 개의 벽이 함께 섰고, 방패는 방패에 부딪혔다. 머리 위로 빙빙 나는 드래곤들의 그림자가 친구든 적이든 가리지 않고 올려다보는 얼굴 모두를 쓸고 지나갔다.
잉크통이 손을 들어 올렸다. "난 장부를 보관한다. 금을 관리하고. 계약서를 쓰고 임금을 저축하고 식량을 살 만큼 충분한 돈이 있게 하는 게 내 일이다. 어느 편에서 싸울지, 언제 싸울지를 내가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건 갈색 벤의 몫이니까. 벤이 돌아오면 그분에게 맡기도록 하지."
플럼이 동료들과 함께 여장군의 막사에서 질주해서 돌아왔을 무렵 흰색 드래곤은 미린 꼭대기의 자기 은신처로 되돌아가고 없었다. 녹색 쪽은 여전히 커다란 초록색 날개를 펼치고 도시와 만 위를 큰 원으로 돌며 어슬렁거렸다.
갈섹 벤 플럼은 끓인 가죽 위에 쇠사슬과 판금 갑옷을 걸쳤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비단 망토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며 연한 청자색에서 짙은 자주색으로 바뀌었는데, 그것만이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플럼은 훌쩍 내리더니 마부에게 말을 맡기고서 날치기에게 장교들을 부르라 일렀다.
"빨리 오라고 해." 교활한 카스포리오가 덧붙였다.
티리온은 하사관조차도 아니었지만, 시바스 게임 덕에 그가 갈색 벤의 막사에 있는 모습에 다들 익숙했고 티리온이 나머지와 함께 천막에 들어섰을 때 막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소환받은 사람으로는 카스포리오와 잉크통 말고도 울란과 보코코가 있었다. 난쟁이는 조라 모르몬트 경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사악한 자매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갈색 벤이 알리자 나머지가 불편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조라 경이 입을 열었다. "누구의 명이지?"
"그 여자애 명령이다. 할아버지 경이 노리는 건 마귀할멈이지만, 다음으로 사악한 자매를 노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유령은 이미 쓰러졌고. 마르셀렌의 해방 노예들이 긴 기마창단을 썩은 나뭇가지 다루듯 부숴버리고 쇠사슬로 유령을 끌고 가버렸다. 셀미가 트레뷰셋을 전부 쓰러뜨리려 할 거라고 생각하더군."
"그 입장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조라 경이 말했다. "나라면 더 일찍 했겠지만."
"왜 계속 명령을 내리는 거지?" 잉크통의 목소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새벽은 이미 지났는데. 태양을 못 본답니까? 자기가 최고사령관인 것처럼 굴고 있잖습니까."
"만약 자네가 그 여자인데 푸딩 얼굴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 알고 있다면 자네라도 계속 지휘권을 쥐고 있을걸." 모르몬트가 말했다.
"둘 다 거기서 거기야." 카스포리오가 주장했다.
"그렇지. 그래도 말라자한텐 젖이 달렸다고." 티리온이 말했다.
"사악한 자매를 지키려면 석궁을 써야지. 전갈석궁. 망고넬. 고정된 물체를 지키려고 기병을 쓴다고? 우리더러 보병이 되란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자기네 투석기병이나 창병을 쓰지 않고?" 잉크통이 말했다.
천막 안으로 켐의 밝은 금발머리가 불쑥 들어왔다. "나리님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전령이 또 왔습니다. 최고사령관의 새 명령을 받들고 왔다 합니다."
갈색 벤이 티리온을 힐끗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들여보내."
"여기로 말입니까?" 켐이 당황해서 물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여기지 않나." 플럼이 살짝 짜증 난 투로 말했다. "다른 곳에 가면 날 못 보겠지."
켐이 나갔다. 돌아왔을 때 켐은 노랑 비단 망토와 거기에 어울리는 판탈롱을 걸친 융카이 귀족을 위해 천막을 걷어주었다. 그 남자의 기름 바른 검은색 머리카락은 엄청난 강도로 꼬인 채 고정되서 마치 머리에 조그마한 장미 백 송이가 피어 있는 것 같았다. 흉갑에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타락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어서 티리온은 동질감을 느꼈다.
"거세병이 하피의 딸을 향해 진격 중이다." 전령이 알렸다. "핏빛 수염과 기스카 군단 둘이 맞서 싸우고 있지. 그들이 방어선을 사수하는 동안 자네들이 내시들 뒤를 덮쳐 피해 없이 쓸어버린다. 최고로 고귀한 권세가이신 융카이 최고사령관 모르가즈 조 제즈진 님의 명이다."
"모르가즈?" 카스포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의 지휘관은 고르자크인데."
"고르자크 조 에라즈는 펜토스 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자신을 누더기 왕자라 칭하는 그 변절자는 이 악행에 대한 죗값으로 비명을 지르며 죽게 되리라고 고귀한 모르가즈 님께서 맹세하셨다."
갈색 벤이 턱수염을 긁었다. "바람결단이 넘어갔군, 그렇지?" 흥미가 담긴 어조였다.
티리온은 낄낄 웃었다. "푸딩 얼굴을 주정뱅이 정복자와 맞바꿨군그래. 술독에서 기어나와서 그럭저럭 분별 있는 명령을 내렸다는 게 놀라운데."
융카이인이 난쟁이를 노려보았다. "그 입 다물어라, 이 해충 같은-" 그의 모욕이 멈췄다. "이 건방진 난쟁이는 탈출 노예로군." 그가 충격에 휩싸여 선언했다. "이자는 고귀한 예잔 조 카가즈의 소유다."
"잘못 본 걸세. 이쪽은 내 전우, 자유인이자 둘째 아들들이지. 예잔의 노예들은 황금 목걸이를 차지 않나." 갈색 벤이 자신의 가장 정감 가는 미소를 내보였다. "작은 종을 매단 황금 목걸이. 종소리가 들리나? 난 아닌데."
"목걸이는 제거할 수 있는 법. 이 난쟁이를 처벌하게 당장 내어줘야겠다."
"그건 너무한데. 조라, 어떻게 생각하나?"
"이렇게." 모르몬트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기수가 몸을 돌리자 조라 경이 그자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검 끝부분은 융카이인의 목 뒤쪽에서 축축한 붉은색이 되어 튀어나왔다. 전령의 입술과 턱을 따라 피가 거품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 남자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두 걸음을 내딛더니 시바스 판 위로 쓰러졌다. 나무로 조각한 군대가 사방에 흩어졌다. 융카이인은 한쪽 손으로 모르몬트의 검을 붙잡고서 다른 쪽 손으로는 뒤집힌 탁자를 힘없이 긁으며 몇 번 더 움찔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홍수처럼 쏟아진 붉은 피와 기름진 검은 장미 가운데 얼굴을 카펫에 처박은 남자가 누웠다. 조라 경이 시체에서 장검을 비틀어 빼내자 칼날이 빠져나온 자리로 피가 흘렀다.
흰색 드래곤은 티리온의 발치에 멈췄다. 티리온은 카펫에 떨어진 시바스 말을 주워들고 소매로 닦았지만 피가 조각 홈에 스며들어 흰 나무에 붉은 혈관이 생기게 되었다. "모두 친애하는 대너리스 여왕님께 만세." 살았던 죽었던 간에. 티리온은 피 묻은 드래곤을 공중에 던지고 낚아채고서 씩 웃었다.
"우린 언제나 여왕님을 섬겼다." 갈색 벤 플럼이 선언했다. "융카이와 다시 손을 잡았던 건 계략이었을 뿐이야."
"참으로 영리한 계책이었지." 티리온은 장화 신은 발로 죽은 남자를 툭 밀었다. "저 흉갑이 맞으면 내가 가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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