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헐떡이며 깨어났다.
콧구멍 안으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아니면 끈덕진 악몽이었나? 또 늑대 꿈을 꿨다. 거대한 무리와 함께 먹잇감의 냄새를 쫓아 어떤 어두운 소나무 숲을 달리는 늑대의 꿈.
희끄무레한 빛이 방을 어둑하게 비췄다. 그녀는 떨면서 침대에 일어나 앉아 손으로 두피를 쓸어보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까슬하게 긁혔다. 이젬바로가 보기 전에 머리를 밀어야겠어. 머시(Mercy), 나는 머시야. 그리고 오늘 밤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겠지. 본명은 머세딘이었지만, 다들 머시라고들 불렀다...
꿈에서만 빼고. 그녀는 심장에서 울리는 울부짖음을 잠재우려 숨을 들이키면서 꿈을 더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이미 거의 잊힌 뒤였다. 그래도 피가 튀겼던 거하고 머리 위로 뜬 보름달, 달리는 동안 그녀를 지켜보던 나무는 기억이 났다.
그녀는 아침 햇살에 깨어날 수 있게 덧창을 젖혀뒀었다. 하지만 머시의 작은 방에 있는 창 밖으론 해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회색 안개의 벽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쌀쌀해졌다... 잘 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종일 잤을 테니. 자기가 강간당하는데 내내 자고 있다면 정말 머시다운 일일 거야.
다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침대보가 그녀 주위로 뱀처럼 얽혀 있었다. 머시는 침대보를 펴고, 담요를 나무 바닥에 던지고서 조용히 창가에 나체로 섰다. 브라보스는 안개에 잠겨있었다. 아래의 작은 수로를 채운 푸른색 물과 그녀가 있는 건물까지 닿은 자갈 깐 길, 이끼로 뒤덮인 다리의 아치가 보였다... 하지만 다리의 끝은 회색 안개 속에서 사라졌고, 수로 건너편 건물들은 희미한 불빛 몇 개에 불과했다. 뱀 머리 배가 다리의 중앙 아치 밑에서 나타나자 가볍게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몇 시에요?" 머시는 뱀의 들린 꼬리 옆에 서서 장대로 배를 밀고 있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장대꾼이 목소리를 좇아 고개를 들었다. "네 시다, 거인 포효로 말하자면." 그의 목소리가 소용돌이치는 푸른색 물과 보이지 않는 건물들의 벽 사이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아직 늦진 않았지만 꾸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머시는 명랑하고 성실한 일꾼이었지만 시간 약속은 자주 어겼다. 그건 오늘 밤의 변명이 되지 못할 거였다. 오늘 저녁 웨스테로스에서 온 사절이 '대문'(*Gate, 극장명)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고, 이젬바로는 아무리 웃어보인다 한들 변명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리라.
머시는 어젯밤 자러 가기 전 수반을 채워놨었다. 바닷물이 수조에서 묵은 끈적한 녹색 빗물보다 나았다. 그녀는 거친 천을 적셔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씻었다. 굳은살 박인 발을 닦을 때는 한쪽 다리로만 서야 했다. 그 뒤에는 면도칼을 찾았다. 대머리면 가발이 더 잘 맞는다고, 이젬바로가 그렇게 주장했다.
머시는 머리를 밀고 속옷을 입고 머리 위로 통짜 갈색 모직 드레스를 뒤집어썼다. 스타킹을 신을 때 보니 한 짝은 수선이 필요해 보였다. 딱딱이(Snapper)에게 도움을 청하리라. 그녀의 바느질은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의상 관리인은 보통 그녀를 불쌍히 여겼다. 아니면 옷장에서 더 나은 걸 훔쳐낼 수도 있어. 위험한 짓이긴 했다. 이젬바로는 극단원들이 그의 의상을 입고 길거리를 다니는 걸 몹시 싫어했으니까 말이다. 웬데인은 예외지만. 이젬바로의 자지를 좀 빨아주면 원하는 건 뭐든 입을 수 있다 그거지. 머시는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다에나가 경고한 바 있었다. "그 길로 빠진 여자애들은 결국 '배'(*Ship, 극장명, ='유랑극단의 배')로 가게 돼, 거기 관람석에 앉은 모든 남자들은 지갑만 두둑하다면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예쁘장한 것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지."
머시의 장화는 소금 자국으로 얼룩덜룩한데다 오래 신어서 갈라진 오래된 갈색 가죽 덩어리였고, 벨트는 파란색으로 물들인 삼베 줄이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끈을 베고, 오른쪽 골반 위로는 칼을, 왼쪽에는 지갑을 매달았다. 마지막으로는 어깨에 망토를 걸쳤다. 그 망토는 진짜 연극단원의 망토였다. 보라색 모직에 붉은 비단으로 안감을 댔고, 비를 막아줄 후드에 비밀 주머니도 세 개 달려 있었다. 머시는 그 주머니 중 하나에 동전 몇 개를 숨기고, 다른 주머니에는 철제 열쇠를, 마지막 주머니에는 칼을 담았다. 그건 엉덩이께에 매단 과도와는 다른 진짜 칼이었다. 하지만 그건 머시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다른 보물들과 마찬가지로. 과도는 머시의 소유였다. 머시는 과일을 먹고, 미소짓고 농담을 던지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머시, 머시, 머시." 그녀는 목제 계단을 내려가 거리에 나서며 그렇게 노래했다. 난간은 쩍쩍 갈라졌고, 계단은 가팔랐으며, 5층이나 내려가야 했지만, 그게 방을 그렇게 싸게 얻은 이유였으니까. 그거랑, 머시의 미소로 얻었지. 머시가 대머리에 깡말랐을지는 몰라도, 웃음이 예뻤고 우아함이 있었다. 이젬바로조차 머시가 우아하다고 인정했다.
까마귀가 날아오를 때 그녀는 '대문'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지만, 날개 다신 다리가 달린 소녀에게는 길이 더 길었다. 브라보스는 삐뚤삐뚤한 도시였다. 길은 비뚤렸고, 골목은 더 삐뚤삐뚤했고, 수로는 뒤틀림의 극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넝마주이 길을 따라 외(外)항만을 걷는 긴 길을 더 좋아했다. 거기에선 바다와 하늘이 그녀의 것이었고 대석호를 넘어 아스날, 셀라고로의 방패에 있는 소나무 비탈까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부둣가를 지날 때면 타르를 칠한 이벤의 포경선, 선체가 거대한 웨스테로스 화물선에 탄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그들의 말을 항상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종종 머시는 미소로 답하고서 동전이 있다면 그녀를 '대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 긴 길을 따르자면 석조 얼굴들이 새겨진 눈의 다리도 건너야 했다. 경간 꼭대기에서 그녀는 아치 사이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진실의 전당에 얹혀진 녹색 구리 돔, 자줏빛 항만에서 숲처럼 솟아오른 돛대들, 권세가의 높은 탑들, 바다군주의 궁전 첨탑을 휘감은 꼭대기의 황금 벼락... 심지어는 짙은 청색 바다 너머로 거인의 청동 어깨마저 보였다. 하지만 그건 태양이 브라보스를 비출 때의 이야기였다. 안개가 짙을 때에는 회색 안개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 머시는 그녀의 불쌍한 갈라진 장화를 조금 덜 닳게 해줄 짧은 길을 선택했다.
엷은 안개는 그녀 앞에서 스러졌다가 그녀가 지나가면 다시금 뭉치는 듯했다. 발 아래 자갈은 젖어서 미끌거렸다. 고양이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브라보스는 고양이가 살기에 좋은 도시였고, 고양이는 도시 어디든 배회했다, 특히 밤에. 안개 속에선 모든 고양이가 회색이야. 머시는 생각했다. 안개 속에선 모든 사람이 살인자야.
머시는 여태껏 이보다 짙은 안개를 본 적이 없었다. 좀 더 넓은 운하에서는 장대꾼들이 뱀 머리 배를 서로의 배를 향해 몰고 있을 것이다,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니.
머시는 반대편으로 걷는 노인을 지나쳤다. 그 노인에겐 등불이 있었는데, 불빛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거리가 너무 어두워서 발을 딛는 곳조차 간신히 볼 정도였다. 도시의 보다 초라한 구역에선 주택, 상점, 창고가 마치 취한 연인처럼 서로에게 기대서 모여 있었는데, 어찌나 상층부가 바짝 붙었는지 발코니를 걸어서 넘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래의 거리는 모든 발걸음이 메아리쳐 울리는 어두운 터널이 되었다. 작은 수로는 훨씬 더 위험했는데, 그 수로들을 짠 주택들은 대개 물 위로 돌출된 화장실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젬바로는 <상인의 애수 어린 딸>에 나오는 바다군주의 연설을 읊기 좋아했다. "여기 마지막 거인이 아직 버티고 서, 형제들의 돌로 된 어깨를 밟고 우뚝 섰네." 라고. 하지만 머시가 좋아하는 건 바다군주가 금색과 보라색으로 칠한 바지선을 타고 지나갈 때 그의 머리에 뚱뚱한 상인이 똥을 싸는 장면이었다. 오직 브라보스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들 했다, 그리고 오직 브라보스에서만 바다군주와 선원 모두가 그걸 보며 함께 박장대소할 거라고.
'대문'은 외항만과 자줏빛 항만 사이, 익사한 마을 끝자락 근처에 위치했다. 낡은 창고가 여기서 불탔었고 매년 땅이 조금씩 더 꺼져가서 땅값이 쌌다. 이젬바로는 침수된 돌기초 위로 동굴 같은 극장을 세웠다. '돔'과 '푸른 등불'이 좀 더 유행에 빠를진 몰라도 두 항구 사이에 위치하면 관람석을 채울 선원과 창녀가 절대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근처에 위치한 배는 이십 년 동안 정박해 있었는데도 여전히 잘생긴 관중들을 정박지로 끌어모으지 않냐고, 그리고 '대문'도 번성하게 될 거라고, 이젬바로는 자기 극단원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판단이 맞았다는 게 드러났다. '대문'의 무대는 건물이 올라가면서 기울어졌고 의상은 곰팡이가 슬기 쉬웠으며 바다뱀이 침수된 지하실에 둥지를 틀기도 했지만, 관객들로 꽉 차기만 한다면야 극단원들에겐 문제 될 게 없었다.
밧줄과 널빤지로 만들어진 마지막 다리는 공허로 녹아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단지 안개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머시가 달려가자 그녀의 발 밑으로 나무가 울렸다. 안개가 마치 너덜너덜한 커튼처럼 젖혀져서 극장을 드러냈다. 버터처럼 노란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왔고, 머시는 그 안에서 얘기하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입구 옆에선 브루스코가 지난 공연의 제목을 덧칠해 덮고선 그 위에 커다란 붉은 글자로 <피투성이 수관>이라고 썼다. 브루스코는 글을 못 읽는 관객을 위해 제목 어래에 피투성이 손을 그리고 있었다. 머시는 구경하려고 멈춰섰다. "멋진 손이네."
"엄지가 삐뚤어졌어." 브루스코가 붓으로 그림 엄지를 두드렸다. "배우들의 왕이 널 찾았는데."
"너무 어두워서 계속 잠만 잤어." 이젬바로가 처음 자신을 배우들의 왕이라 칭했을 때, '대문' 사람들은 경쟁자인 '돔'과 '푸른 등불'의 격노를 음미하며 거기서 못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 이젬바로는 그 칭호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젠 왕만 연기하겠단다." 마로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리고 왕이 등장하지 않는 연극이면 곧 무대에 올리지도 않을걸."
<피투성이 수관>에는 뚱뚱한 왕과 소년 왕, 두 명의 왕이 등장했다. 이젬바로는 뚱뚱한 왕을 맡았을 것이다. 별로 중요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누워서 죽어가면서 꽤 멋진 연설을 했고 그 전에 악마 같은 멧돼지와 눈부시게 겨루는 장면이 있었다. <피투성이 수관>의 작가는 브라보스를 통틀어 가장 피에 젖은 깃펜을 놀리는 파리오 포렐이었다.
머시는 극단원들이 무대 뒤편에 모여 있는 걸 보고서 지각한 게 들키질 않기를 바라며 뒤쪽에 선 다에나와 딱딱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젬바로가 안개가 끼긴 했지만 그래도 '대문'이 서까래까지 사람으로 꽉 차길 기대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웨스테로스의 왕이 배우들의 왕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사절을 보냈다." 그가 자기 극단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친애하는 웨스테로스 군주를 실망시켜선 안 되겠지."
"우리?" 극단원 모두에게 의상을 지어 주는 딱딱이가 말했다. "이젠 저 인간 하나 말고도 더 있는 거야?"
"뚱뚱해서 두 명은 충분히 되잖아요." 보보노가 속삭였다. 모든 극단엔 난쟁이가 필요했고, 보보노는 '대문'의 난쟁이었다. 그는 머시를 보자 음흉한 시선을 던졌다. "아하. 저기 있구만. 꼬마 아가씨가 강간당할 준비는 되셨을라나?" 그가 입맛을 다셨다.
딱딱이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조용히 해."
배우들의 왕은 그 짤막한 소동을 무시했다. 이젬바로는 계속 오늘 얼마나 훌륭하게 연기해야 하는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웨스테로스 사절을 빼놓더라도, 오늘 저녁 관객으로 사무관이나 유명한 코르티잔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젬바로는 그들이 '대문'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가지고 나가게 둘 생각이 없었다. "날 실망시키는 사람은 누구던 고통을 겪게 될 거다." 그는 그렇게 공언했는데, 그건 파리오 포렐이 쓴 첫 번째 작품 <드래곤군주들의 격노>에서 가린 왕자가 전투 전 날 하는 연설 대사에서 따온 거였다.
이젬바로가 마침내 말을 마쳤을 무렵엔 공연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때였고 극단원들은 다들 차례로 긴장해서 허둥거렸다. '대문'이 머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머시," 친구인 다에나가 애원했다. "스토크 부인이 가운 자락을 또 밟았어. 꿰매는 걸 도와줘."
"머시," 이방인이 불렀다. "망할 풀 가져와, 뿔이 떨어지려 해."
"머시," 자칭 이젬바로 대왕이 소리쳤다. "내 왕관은 어쩐 거냐? 왕관 없이 나갈 순 없어. 왕관이 없으면 내가 왕인 걸 어찌 알겠어?"
“머시,” 난쟁이 보보노가 끽끽댔다. “머시, 끈이 뭔가 잘못됐어. 거시기가 자꾸 튀어나온다고.”
머시는 끈적끈적한 풀을 가져와 이방인의 왼쪽 뿔을 다시 이마에 붙였다. 머시는 이젬바로의 왕관을 그가 늘 두는 화장실에서 찾아내고 왕관을 가발에 고정시키는 걸 도왔다. 그리고선 딱딱이가 왕비가 결혼식 장면에서 입을 금색 가운에 다시 레이스 자락을 꿰맬 수 있게 바늘과 실을 찾아 뛰어갔다.
그리고 보보노의 거시기는 역시나 튀어나와 있었다. 강간 장면에 쓸 수 있도록 튀어나오게 만들어진 거긴 했다. 끔찍하게도 생겼네. 머시는 분장을 고치려고 난쟁이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생각했다. 그 물건은 길이가 30센티에 굵기는 그녀 팔뚝만해서 가장 높은 발코니에서도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염색공이 가죽을 형편없이 물들여놔서 분홍색과 흰색이 얼룩덜룩했고 둥글납작한 귀두는 자두색이었다. 머시는 그걸 보보노의 바지 안으로 다시 밀어넣고 끈을 매 주었다. “머시,” 머시가 끈을 조이자 그가 노래했다. “머시, 머시, 오늘 밤 내 방에 와서 날 남자로 만들어줘.”
“나한테 가랑이 만져지고 싶어서 자꾸 끈 풀면 고자로 만들어버릴 거야.”
“우린 함께할 운명이야, 머시.” 보보노가 고집했다. “봐, 키도 딱 똑같잖아.”
"내가 무릎 꿇었을 때나 그렇지. 대사 첫 줄은 기억해?" 난쟁이가 무대에 술잔을 든 채 휘청거리며 오르더니 <상인의 원기 왕성한 부인>에 나오는 그럼킨의 대사로 <집정관의 번민>을 시작한 지 고작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보보노가 또 그런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다면 이젬바로는 쓸만한 난쟁이를 찾는 게 아무리 힘들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보노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릴 거였다.
"우리가 뭘 공연하더라?" 보보노가 모른다는 투로 물었다.
놀리는 거야, 머시가 생각했다. 오늘 밤엔 안 취했어, 공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아. "칠왕국에서 온 사절을 위해서 파리오의 새 연극 <피투성이 수관>을 올리잖아."
"이제 기억나네." 보보노가 사악한 톤으로 목소리를 내렸다. "칠면의 신이 나를 속였도다." 그가 말했다. "순금으로 빚어진 내 고귀하신 부친, 금으로 내 형제자매를, 소년과 소녀를 만들었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음험한 것으로 만들어졌으니, 뼈와 피, 진흙이 뭉쳐 네 앞에 선 이 저속한 형상으로 일그러졌도다." 그러더니 보보노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젖꼭지를 더듬거렸다. "가슴이 없잖아. 젖통도 안 달린 애를 어떻게 강간한담?"
머시는 엄지와 검지 사이로 보보노의 코를 쥐고서 비틀었다. "손 떼기 전까진 안 놔준다."
"아오오오오." 난쟁이가 꽥 소리를 지르더니 손을 뗐다.
"가슴은 일이년 내로 자랄 거야." 머시가 일어나자 작은 남자 위로 우뚝 섰다. "하지만 코를 또 자라게 할 순 없다고. 나한테 손대기 전에 그걸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보보노가 연약한 코를 문질렀다. "그렇게 쑥스러워 할 거 없어. 어차피 곧 내가 널 강간할 텐데."
"2막 전까진 아니지."
"<집정관의 번민>에서 웬데인을 강간할 때면 항상 가슴을 꽉 쥐어주는데." 난쟁이가 불평했다. "웬데인은 그걸 좋아해, 관객들도 좋아하고. 관객들을 즐겁게 해 줘야지."
그건 이젬바로의 '지혜' 중 하나였다. 이젬바로는 그렇게 부르길 좋아했다. 관객들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고. "분명 내가 난쟁이 자지를 뜯어내고 그걸로 난쟁이 머리를 두들겨 패면 관객들도 즐거워할 걸." 머시는 대답했다. "지금껏 한 번도 못 본 거일 테니까." 항상 관객들에게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라는 것 또한 이젬바로의 또 다른 '지혜'이자 보보노가 쉬이 답할 수 없는 거였다. "됐지, 이제 끝." 머시가 선언했다. "이제 써먹을 때가 오기 전까지 바지를 잘 간수하나 보자고."
이젬바로가 그녀를 또 부르고 있었다. 이번엔 멧돼지 사냥용 창이 안 보인단 거였다. 머시는 창을 찾아주고, 브루스코가 멧돼지 의상을 입는 걸 돕고, 소품으로 쓰는 단검의 날을 누가 진짜 칼날로 바꿔치기 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언제 한번 '돔'에서 누가 그런 짓을 했는데, 배우가 죽었다) 그리고선 스토크 부인에게 그녀가 공연하기 전마다 마시길 좋아하는 와인을 조금 따라주었다. 마침내 "머시, 머시, 머시"를 부르짖는 외침이 잦아들자 머시는 잠깐 짬을 내 바깥을 훔쳐보았다.
관람석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붐볐고, 사람들은 이미 농담을 던지고 북적대고 먹고 마시면서 즐기고 있었다. 손님이 생길 때마다 손으로 치즈 덩어리를 찢어내는 치즈 행상이 보였다. 주름진 사과 한 자루를 든 여자가 있었다. 와인 부대는 이미 손에서 손으로 오가는 중이었고, 여자애 몇몇은 입맞춤을 팔았으며, 한 선원은 바다 파이프를 연주중이었다. 슬픈 눈을 가진 '깃펜'이라는 조그만 남자는 뒤편에 서서 자기 연극에 써먹게 뭐 훔쳐낼 만한 게 없나 보러 온 참이었다. 요술쟁이 코소모도 왔는데, 품에 행복한 항구의 외눈박이 창녀 이나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머시는 그 두 사람을 알 수 없었고, 그들도 머시를 알 수 없었다. 다에나는 군중 속에서 단골들을 알아보고 머시에게 그 사람들을 짚어주었다. 파리한 흰 얼굴에 얼룩덜룩한 보라색 손을 가진 염색공 델로노, 기름때 낀 가죽 앞치마를 입은 소시지 만드는 갈레오, 어깨에 애완 쥐를 얹은 키 큰 토마로. "토마로는 갈레오가 저 쥐를 못 보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에나가 경고했다. "내가 듣기로 갈레오가 소세지에 넣는 고기라곤 쥐밖에 없대." 머시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발코니도 가득 찼다. 1층과 3층은 상인과 선장, 그리고 다른 존경받을 만한 시민들을 위한 자리였다. 평범한 브라보스인들은 좌석값이 가장 싼 4층과 꼭대기 층을 선호했다. 위로는 밝은 색이 진동했고, 아래로는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흔들렸다. 2층 발코니는 개인 박스석으로 구획이 나뉘어서, 거기 앉는 권세가는 위아래로 가득한 저속함에서 벗어나 사생활과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2층의 시야가 제일 좋았고, 하인들은 음식, 와인, 쿠션 뭐든 손님들이 원하는 걸 가져다 바쳤다. '대문'의 2층 발코니석이 절반 넘게 차는 일은 드물었다. 연극을 그렇게 제대로 즐기고픈 권세가는 '대문'보다 섬세하고 시적인 공연을 올리는 '돔'이나 '푸른 등불'에 갈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도 오늘 밤은 달랐다, 웨스테로스에서 온 사절 덕택에. 한 박스석에는 오다리스 가문원 셋이 각각 유명한 코르티잔을 끼고 앉았다. 너무나 늙어서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긴 했을까 의문이 들게 하는 프레스테인은 혼자 앉았다. 토론과 프라넬리스는 불편한 동맹을 맺었듯 박스석도 불편하게 공유했다. '세 번째 검'은 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사무관을 다섯 봤어." 다에나가 말했다.
"베사로는 뚱뚱하니까 두 번 세야 해." 머시가 깔깔대며 대답했다. 이젬바로의 배가 불룩하긴 했지만, 베사로와 비교하자면 버드나무처럼 낭창낭창한 몸이었다. 그 사무관은 너무 거대한 나머지 일반 의자의 세 배나 되는 특별한 좌석이 필요했다.
"레이안 가문 사람들은 다 뚱뚱해." 다에나가 말했다. "자기네 선박만큼이나 배가 크지. 저 사람 아버지를 봤어야 하는데. 저 인간도 작게 보일 덩치였다고. 한번은 진실의 전당에서 투표하라고 소환받았는데, 바지선에 발을 딛으니까 배가 가라앉았어." 다에나가 머시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봐, 바다군주의 좌석이다." 바다군주는 한 번도 '대문'을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어쨌든 이젬바로는 극장을 통틀어 가장 크고 호화로운 박스석을 바다군주의 지정석으로 남겨두었다. "저 사람이 웨스테로스 사절일 거야. 저렇게 나이 든 사람이 저런 옷 입은 거 본 적 있어? 그리고 봐, 흑진주를 데려왔어!"
사절은 웃기게 생긴 회색 가닥들을 턱수염이랍시고 기른 여위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남자였다. 망토와 바지는 노랑색 벨벳이었다. 더블릿은 어찌나 밝은 파랑색인지 머시의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가슴팍에는 노란 실로 방패가 수놓여 있었고, 방패에는 청금석에서 뽑아낸 푸른색으로 물들인 위풍당당한 청색 수탉이 있었다. 위병 중 하나가 그가 좌석에 앉는 걸 도왔고, 다른 두 명은 박스석 뒤편에 섰다.
사절과 함께 온 여자는 남자 나이의 3분의 1도 안 되어 보였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녀가 지나갈 때면 등불도 더 밝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흑진주는 가슴이 깊게 파인 가운을 차려입었는데, 연노랑색 실크로 지은 옷이라 그녀의 밝은 갈색 피부와 놀랍도록 대조됐다. 검은색 머리는 금사 망으로 묶었고, 흑요석과 금이 박힌 목걸이는 풍만한 가슴 위로 살짝 스쳤다. 그들이 지켜보던 와중 그녀가 사절 가까이 몸을 숙이더니 귓가에 뭐라고 속삭여 사절이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갈색 진주라고 불러야 해." 머시가 다에나에게 말했다. "검다기보단 갈색인 걸."
"첫 번째 흑진주는 잉크처럼 까맸어. 바다군주의 아들과 여름 제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해적 여왕이었지. 웨스테로스의 드래곤 왕(*아에곤 4세)이 자기 정부로 들였고."
"드래곤을 보고 싶다." 머시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왜 저 사절은 가슴에 닭을 달고 있는 거야?"
다에나가 아우성을 쳤다. "머시, 그것도 몰라? 문장(*다에나는 sigil이 아니라 siggle이라고 말하고 있다)이잖아. 해넘이 왕국에선 모든 영주들이 자기 문장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꽃, 어떤 사람들은 물고기, 어떤 사람들은 곰 아님 엘크, 다른 것들도 많고. 보이지, 사절의 위병들은 사자를 달고 있잖아."
사실이었다. 위병은 네 명이었다. 다들 덩치가 컸고, 고리 갑옷과 웨스테로스의 묵직한 장검으로 무장한 거칠게 생긴 남자들이었다. 금색으로 가장자리를 댄 진홍색 망토는 눈으로 붉은 석류석이 박힌 황금 사자로 여몄다. 머시가 금박을 입힌 사자 모양 투구 밑의 얼굴들을 슬쩍했을 때, 그녀의 배가 전율했다. 신들께서 내게 선물을 주셨어. 그녀의 손가락이 다에나의 팔 깊숙이 파고들었다. "저 위병, 흑진주 뒤 끝에 선 사람."
"저 사람이 왜? 아는 사람이야?"
"아니." 머시는 브라보스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웨스테로스인을 알겠는가? 잠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냥... 그러니까, 잘생겨서, 안 그래?" 정말로 거칠게나마 잘생기긴 했다, 눈은 엄혹했지만.
다에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엄청 늙었는걸. 다른 사람들만큼 늙진 않았지만... 서른은 되겠다. 그리고 웨스테로스인이잖아. 끔찍한 야만인이라고, 머시. 저런 작자들하곤 거리 두는 게 좋을 걸."
"거리를 두라고?" 머시가 깔깔댔다. 그녀는 잘 웃는 여자애, 머시였다. "아니, 더 가까이 가야겠어." 그녀는 다에나의 손을 꽉 쥐고서 말했다. "만약 딱딱이가 찾으면 내가 대사 연습하러 갔다고 말해줘." 머시의 대사는 몇 줄 없었고, 그마저도 거의 다 "아, 안 돼요, 안 돼, 안 돼." 나 "하지 마요, 아 안 돼, 손대지 마." 혹은 "제발요, 나리, 전 아직 처녀랍니다." 따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젬바로가 뭐든 대사 있는 역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불쌍한 머시가 대사를 숙지하려고 연습할 거란 건 뻔했다.
칠왕국에서 온 사절은 자신과 흑진주 뒤에 위병 둘을 배치하고 다른 둘은 방해받지 않으려고 문 밖에 세웠다. 머시가 어두운 복도에서 소리 없이 그들을 향해 미끄러져 갔을 때 바깥에 선 위병 둘은 웨스테로스의 공용어로 조용히 얘기중이었다. 그건 머시가 아는 언어가 아니었다.
"일곱 지옥아, 왜 이리 축축해." 위병이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뼛속까지 한기가 들었다고. 망할 오렌지 나무는 어딨는 거야? 자유도시에는 오렌지 나무가 있다고 들었는데. 레몬, 라임, 석류, 고추도 있고. 밤이 따뜻하고 여자애들은 배를 까고 다닌다고. 배를 내놓고 다니는 여자애들은 어디 있는 건데?"
"저 아래 리스, 미르, 옛 볼란티스에 있겠지." 다른 위병이 대답했다. 이쪽은 더 나이가 들어서, 배가 나오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였다. "타이윈 공이 아에리스의 수관이었을 때 리스에 가본 적 있었지. 브라보스는 킹스랜딩보다 북쪽에 있다, 멍청아. 염병할 지도 볼 줄 모르냐?"
"거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네 기대보다 오래." 나이든 쪽이 답했다. "저 자식이 금 없이 돌아가면 대비가 머리를 잘라버릴 거다. 그리고, 저놈 마누라를 본 적 있는데 하도 살이 쪄서 캐스털리 락 계단을 무서워서 못 내려갈 정도였다고. 지금 검댕 여왕을 끼고 있는데, 누가 그런 인간들이 기다리는 데로 돌아가려 하겠어?"
잘생긴 위병이 씩 웃었다. "우리랑 저 계집을 나누지 않을까, 일 다 보고 나면?"
"뭐, 미쳤냐? 우리 같은 인간들을 신경이나 쓸 것 같아? 그 병신은 우리 이름도 제대로 모른다고. 클리게인은 달랐나 보지."
"경은 연극이나 비싼 창녀들한테 신경쓰는 분이 아녔지. 경이 계집을 원할 때면 그냥 가졌지만, 가끔은 그 뒤에 우리가 품을 수 있게 해줬어. 한번 쓴 뒤라도 좋으니 흑진주 맛을 보고 싶은데. 가랑이 사이는 분홍색일까?"
머시는 대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피투성이 수관>이 막 시작하려 했고, 딱딱이가 의상 손질을 도우라고 그녀를 찾고 있을 거였다. 이젬바로가 배우들의 왕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건 딱딱이었다. 잘생긴 위병과 보낼 시간은 미룰 수 있었다.
<피투성이 수관>은 묘지에서 막을 올렸다.
나무 묘비 뒤에서 갑자기 난쟁이가 나타나자 관객들이 우우 하며 욕을 퍼부었다. 보보노는 뒤뚱거리며 무대 앞으로 걸어가 관객들을 곁눈질했다. "칠면의 신이 나를 속였도다." 그가 대사를 외치기 시작했다. "순금으로 빚어진 내 고귀하신 부친, 금으로 내 형제자매를, 소년과 소녀를 만들었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음험한 것으로 만들어졌으니, 뼈와 피, 진흙이 뭉쳐..."
그때 길다란 검정 로브를 입은 마로가 이방인 신의 수척하고 끔찍한 몰골을 하고서 보보노 뒤에서 나타났다. 마로의 얼굴도 검은색이었고, 이빨은 피로 붉고 번들거렸으며, 상아색 뿔은 이마에서 위로 솟아올랐다. 보보노는 그를 볼 수 없었지만 발코니에선 보였고, 이젠 일반 관객석에서도 보였다. '대문'이 점점 조용해졌다. 마로는 말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머시도 마찬가지였다. 의상은 모두 걸어두었고, 딱딱이는 다에나가 궁정에 서는 장면에서 입을 가운을 꿰매느라 바빴기 때문에 머시가 없어도 티 날 염려가 없었다. 머시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편으로 돌아가 위병들이 사절의 박스석 바깥에 서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어두운 벽감 안에 돌처럼 가만히 서 있자니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확신을 얻기 위해 그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내가 너무 어린가? 너무 평범한 얼굴인가? 너무 말랐나? 가슴이 큰 여자애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길 바랐다. 그녀의 가슴으로 얘기하자면 보보노가 옳았으니까. 단둘이 있게 내가 원하는 곳으로 끌어낼 수 있다면 최고일 텐데. 하지만 날 따라올까?
"그놈일 수도 있을까?" 매력적인 쪽이 말했다.
"뭔 소리야, 다른자들이 정신을 빼 간 거냐?"
"안 될 거 있나? 난쟁이 아뇨?"
"세상에 난쟁이가 꼬마 악마 하나냐."
"아닐 지도 모르지, 하지만 보쇼, 다들 꼬마 악마가 얼마나 영리한지 입을 모아 얘기하잖아. 어쩌면 제 누이 눈을 피할 가장 좋은 곳으로 자기 자신을 웃기는 연극단을 골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누나 코를 비틀어주려고."
"아, 정신이 나갔구만."
"흠, 어쩌면 연극이 끝나면 따라가서 직접 알아봐야 할지도." 위병이 검대 위로 손을 올렸다. "만약 내가 맞다면, 영주가 되겠지. 만약 틀렸다면, 피 좀 보지 뭐, 난쟁이일 뿐이니까." 그가 크게 웃었다.
무대 위에선 보보노가 마로의 사악한 이방인과 흥정 중이었다. 보보노는 작은데도 목소리가 컸고, 지금 그의 목소리는 가장 높은 서까래까지 울렸다. "나에게 잔을 주시오." 그가 이방인에게 말했다. "깊게 들이켤 잔을 주시오. 금과 사자 피 맛이 난다면 더욱 좋으니. 난 영웅이 될 수 없는 몸, 날 괴물로 만들어 그들에게 사랑 대신 두려움으로 교훈을 주리라."
머시는 보보노의 마지막 대사를 입모양으로 함께 읊었다. 그녀의 것보다 더 나은 대사였고, 시의적절하기도 했다. 날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야, 그러니 연극을 시작해. 그녀는 다면신에게 소리 없이 기도를 올리고, 벽감에서 빠져나와 위병들 앞에 튀어나갔다. 머시, 머시, 머시. "영주님들, 브라보스어 하세요? 아,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두 위병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또 뭐야?" 나이 든 쪽이 물었다. "얜 누구지?"
"배우 중 하나요." 매력적인 쪽이 말했다. 그가 색이 밝은 머리카락을 이마 너머로 쓸어넘기고선 미소를 지었다. "미안, 예쁜아. 네가 뭐라 떠드는진 못 알아듣겠다."
가식, 머시는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공용어밖에 몰라. 좋지 않았다. 포기하거나 밀어붙여. 포기할 순 없었다. 그 정도로 이 사람을 원했다. "전 공용어를 해요, 조금이지만요." 그녀는 머시의 가장 달콤한 미소를 내보이며 거짓말을 했다. "웨스테로스의 영주님들이시죠, 친구가 그랬어요."
나이든 쪽이 웃었다. "영주? 그래, 그렇다."
머시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젬바로가 영주님들을 기쁘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지… "
두 위병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잘생긴 쪽이 손을 뻗어 가슴을 만졌다. "뭐든지?"
"역겹구만." 나이든 쪽이 말했다.
"왜? 이젬바로가 환대를 해주겠다는데, 거절하면 무례 아뇨." 아까 의상을 손봐줄 때 난쟁이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가 옷감 위로 그녀의 젖꼭지를 비틀었다. "배우가 창녀 다음으로 좋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얘는 아직 어린애야."
"아니에요," 머시는 거짓말을 했다. "전 이제 처녀랍니다."
"오래가진 못할 거다." 반반한 쪽이 말했다. "나는 라포드 공이다, 예쁜아. 그리고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알지. 이제 치마 올리고 저 벽에 기대."
"여기선 말고요." 머시가 그의 손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연극이 들리는 곳에선 안 돼요, 혹시 소리를 냈다간 이젬바로가 엄청 화를 낼 거에요."
"그럼 어디서?"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나이 든 위병이 인상을 썼다. "뭐, 이대로 내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혹시 널 찾으면 어쩔 건데?"
"뭐하러 그러겠소? 볼 연극도 있겠다, 거기에 창녀도 끼고 있는데. 내가 창녀를 품으면 안 될 이유가 뭐지? 얼마 안 걸릴 거요."
그래, 그녀는 생각했다. 얼마 안 걸릴 거야. 머시는 그의 손을 잡고 뒤편으로 돌아 계단을 내려가서 안개 낀 밤으로 이끌었다. "원한다면 배우가 될 수도 있어요." 그가 그녀를 극장 벽에 밀어붙이자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내가?" 위병은 코웃음쳤다. "난 아냐. 그 염병할 대사들 하며, 절반도 기억 못 할 거다."
"처음엔 어렵죠." 머시는 인정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쉬워져요. 대사를 말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어요, 가르쳐 줄게요."
그가 머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가르치는 건 내가 하지. 첫 번째 수업을 받을 시간이야." 그는 머시를 몸에 바싹 끌어당기고서 입술을 맞추고 그녀의 입 안에 자기 혀를 밀어넣었다. 혀는 장어처럼 온통 축축하고 미끌거렸다. 머시는 그의 혀를 자기 것으로 핥고서 숨이 가쁜 채 입을 뗐다. "여기선 말고요. 누가 볼지도 몰라요. 제 방이 가까이에 있긴 한데, 서둘러야 해요. 2막 전까진 돌아가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강간당하는 걸 놓쳐요."
그가 씩 웃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도 머시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손에 손을 잡고서, 그들은 안개 사이로 다리와 골목과 갈라진 계단 다섯 층을 달렸다. 머시의 작은 방 안에 들이닥쳤을 때 위병은 헐떡이고 있었다. 머시는 수지 양초를 켜고서 깔깔대며 춤을 추며 그를 돌았다. "아, 지치셨군요. 제가 나리 나이를 까먹었어요. 잠깐 주무실래요? 누워서 눈 감고 계심 꼬마 악마가 절 강간한 뒤에 돌아올게요."
"넌 아무 데도 안 가." 그가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누더기 벗어, 그러면 내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보여주지."
"머시," 그녀가 말했다. "내 이름은 머시에요. 말할 수 있나요?"
"머시."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라프다."
"알아요."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다대자 모직 바지 아래로 그가 얼마나 발기했는지가 느껴졌다.
"착하지, 끈 풀어." 그가 재촉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는 그의 허벅지 안쪽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젠장, 조심하라고, 지금-"
머시는 헉 하더니 당황하고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피가 나요."
"무슨-"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신들이시여. 무슨 짓을 한 거야, 쥐방울만한 개년아?" 그의 허벅지 위로 붉은색 얼룩이 퍼져나가며 무거운 직물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것도요." 머시가 끽끽댔다. "전 절대... 아, 아, 피가 너무 많이 나요. 그만, 그만 해요, 무서워."
그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으로 허벅지를 누르자 손가락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와 다리를 타고 장화로 흘러들어갔다. 지금은 별로 잘생겨 보이지 않네. 그녀는 생각했다. 그냥 새하얗게 겁에 질렸을 뿐이야.
"수건," 위병이 헐떡였다. "수건을 가져와, 아님 걸레나, 그걸 대고 눌러. 빌어먹을. 어지러운데." 그의 다리는 허벅지에서 흐른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가 다리에 체중을 실어보려고 하자 무릎이 꺾이더니 고꾸라지고 말았다. "도와줘." 사타구니 부근까지 붉어지자 그가 애원했다. "어머니께서 자비를 베푸시길. 의사... 가서 의사를 찾아와, 빨리."
"의사는 다음 수로에 있는데, 안 올 거에요. 직접 가야 해요. 걸을 수 없어요?"
"걸어?" 그의 손가락은 피로 번들거렸다. "눈깔이 멀었냐? 멱 따인 돼지처럼 피가 나는구만. 이 꼴로 걸을 순 없다고."
"그럼 거기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날 업고 가야지."
봤지? 머시는 생각했다. 넌 대사를 알아,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 아리아가 다정하게 물었다.
친절한 라프는 그녀의 소매에서 길고 얇은 칼날이 빠져나오는 것을 똑똑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칼을 라프의 턱 밑에 밀어넣고 비틀고서 한 번 매끄럽게 그어서 반대편에서 뽑아냈다. 가는 붉은색 비가 뒤따랐고, 눈에선 불이 꺼졌다.
"발라 모굴리스." 아리아는 속삭였지만 라프는 죽어서 듣지 못했다.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죽이기 전에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걸 도왔어야 했어. 이젠 수로 아래로 끌고 내려가서 굴려넣어야겠지. 나머지는 장어들 몫이었다.
"머시, 머시, 머시." 그녀는 슬프게 노래했다. 머시는 멍청하고 경박한 여자애였지만 심성은 착했다. 머시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다에나와 딱딱이 그리고 나머지, 심지어는 이젬바로와 보보노까지도 그리울 것이다. 이 일로 바다군주와 가슴에 닭을 단 사절에게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었다. 뛰어야겠지. 머시에겐 아직 말해야 할 대사가 첫 마디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남아 있었고, 만일 머시가 강간당하는 데 늦는다면 이젬바로는 그녀의 예쁘고 작은 텅 빈 머리통을 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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